니가 왜 거기서 나와
바야흐로 휴가 시즌이다. 사람들이 여름휴가 계획을 물어왔을 때 늘 ‘없음’으로 답했었다. 너도나도 자리비움이 자연스러울 시기에 사무실의 No.1, No.2 그리고 옆 팀장까지 순차적이고 중첩적으로 휴가를 떠났다. 그들 중 누구 하나 내게 사무실을 맡긴 자는 없지만 괜스레 스스로 책임감을 더하면서 회사의 장승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뒤늦게 그것도 갑작스럽게 정해진 여름휴가가 하필이면 그들의 부재와 일부 겹쳤다. 최대한 빈자리를 덜 만들고자 출국하는 날까지도 출근을 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실은 출국 시간이 밤 9시였으므로, 출국하는 날 정상근무를 하는 것이 비정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출근한다는 걸 내세워 나는 회사에서 바로 공항으로 가고 출퇴근이 자유로운 신랑에게 아이 둘과 미리 싸 놓은 캐리어 2개를 맡겼다.
우리의 재회 시간은 6시였는데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체크인 카운터인 H 쪽으로 가는데, 한 블록 잘못 들어섰다. 그리고 내 눈앞에 펼쳐진 장면.
휴가 직전까지 휘몰아쳤던 일들과 휴가를 떠나는 날 새벽 2시까지 짐을 챙긴 여파로 공항철도 안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반쯤 눈을 감은 상태로 누구를 위한 휴가인가를 중얼중얼거리면서 배회하고 있었는데, 서점을 발견하는 순간 몸 안에 모든 세포들이 동면에서 깨어났다. 아주 가뿐하고 개운하고 활기차게.
언제부터였을까?
인천공항에 서점이 들어선 것은.
2004년부터 인천공항을 다녔지만 한 번도 이곳에 자리 잡은 서점에 눈길을 주지 않았었다. 역시 눈이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인 세계를 사는 게 아니라 나만의 주관적인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손에 들었던 여권과 E-ticket을 가방 속에 쑤셔 넣고 서점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뒤에서 밀어주는 것처럼. 확 트인 입구는 빽빽한 책들 사이에서 여유를 선사했다. 공항에 있는 서점답게 국가별 여행책들이 위풍당당하게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책이 전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가 담긴 제목과 부제목들 사이를 거니는 것은 내가 가장 애호하는 산책 코스다. 눈길이 길어질수록 발걸음은 더뎌진다. 그러다 멈추는 지점은 언제나 지금 현재 나의 관심사와 맞닿아 있다. 내 생각이 가닿아 있는 곳에서 작가의 목소리를 들으면 우군을 얻은 듯 든든함이 더해진다.
나태주 시인의 <오늘도 나는 집으로 간다> 속에 빠져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공항에 도착한 아이들의 호출이다. 못내 아쉬운 마음에 겨우 책을 내려놓고 가족 곁으로 갔다.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한 마냥 방금 내가 보고 느낀 것에 대하여 신나서 아이들에게 설명하였다(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 얼굴은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달뜬 표정이다). 짧은 시간 마주한 서점의 공기가 이 여행을 시작할 새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체크인, 수하물 부치기, 출국심사, 보안 검색대 통과의 수순을 거치고 배고픔까지 해결하고 난 후 게이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121번 게이트를 찾아가는데 또 반가운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Again, Books & Travel
비행기 탑승 직전에 다시 한번 서점에 있을 수 있는 행운이 내게 주어지다니!! 멀찍한 게이트와 게이트 사이의 이동 피로를 단축시켜 주는 무빙워크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자동반사하듯 옆길로 샜다. 탑승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10분.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좋은 글귀 하나 마음에 담기에는 충분하다. 바삐 돌아가는 레이더망에 잡힌 것은 홍승우 작가의 웹툰 <올드 OLD>.
어디서 알게 되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확실한 건 우리는 구면이다. 50대 자식과 80대 부모가 어쩌다 동거를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가족일상 에피소드. 나이 들어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된 연유를 소개하는 첫 화부터 그림체와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때, 탑승 지연 안내 방송이 나왔다. 발화자의 의도와는 달리 내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가 소환되었다.
내게는 이미 이번 여행에 함께할 <법륜스님의 행복>과 신랑에게 빌려주었다가 방금 돌려받은 책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가 있었지만(두 번 재촉하기는 하였지만 이 책을 인천공항에서 돌려받을지는 상상도 못 했다), 비행기에 탑승하는 내 손에는 <올드 OLD>가 있었다. 탑승지연 덕분에 예상보다 많은 페이지를 넘겼는데 이 정도까지 보고 나니 ‘만나서 반가웠어’하고 쿨하게 헤어질 수가 없었다. 짧은 말풍선에 나타난 인생의 희로애락이 유머와 어우러져서 거부감이 없이 스며들었다. 무거운 이야기도 어느새 내 가까이에 와 있었다.
유머는 무거운 것을 가볍게 만들고,
가벼운 것의 의미를 찾아 주며,
무엇보다 그냥 우리를 폭 안아줘서
무방비 상태로 만든다.
<만질 수 있는 생각>, 이수지, 143p
공항 도착시간의 기준은 늘 출국 시간 3시간 전이었는데 앞으로는 가능한 한 빨리 가 있어야겠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