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소된 약속이 만나게 해 준 사람책
새해 첫날부터 휘몰아쳤던 일이 마무리된 다음날. 13여 년 전 친하게 지냈던 지인을 만나기로 했다. 연락을 하지 않은지 오래되었지만 늘 가방에 세네 권의 책이 있었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었다. 이제야 책의 가치와 소중함을 알게 된 나는 그 옛날부터 책의 진가를 알아본 그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책과 함께한 인생이 어떠했는지, 지금도 그대로인지를 묻고 싶었다. 그런데 약속날 아침에 그는 울산으로 출장을 가고 있었고 약속시간까지 올라오기 어려울 것 같다며 다음을 기약하였다.
오늘도 계획은 계획으로 남았다. 계획이 틀어져서 생긴 틈을 메꾸는 것도 나름 재미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내 앞에 다시 놓인 백지 위에 어떤 그림을 그릴까. 보고 싶지만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연락만 했던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갑작스러운 만남의 성사율은 쉬이 제로에 수렴한다. 상대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로 해보자. 1월 내내 흐트러진 책 읽기 일상을 바로 세워볼까?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가고 싶었던 책방이 떠올랐다.
오픈 시간 정각에 책방의 문을 미는 상상을 하며 마로니에 공원을 지나 낙산공원 쪽으로 향했다. 7시를 갓 넘긴 시간임에도 벌써 두 명의 방문객이 있었다. 책방지기님의 공간으로 보이는 천막 뒤가 휑하여 책방지기님의 행방은 묘연했지만 일단 책방을 둘러보았다. 독립서점답게 독립출판물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 와중에 이달의 선인장 북클럽 책인 <시대예보 : 핵개인의 시대>를 발견하자 괜히 반가웠다. "우리 책방에서 제일 안 팔리는 부문인 슬픈 비문학"이라는 소개글이 웃음 짓게 했다(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책방지기님이 너무 재밌게 읽은 책이라 4권 입고했는데 아직 하나도 안 팔렸다고 한다). 책방지기님의 운영 철학이 드러난 과몰입 이용 가이드(궁금한 책은 자유롭게 꺼내 읽기/구입 부담 없이 자유롭게 구경/추천 원하면 책방지기에게 말 걸기)를 보자, 마음 놓고 오래 머무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손님을 기다리는 여러 개의 의자도 이곳에서의 시간을 더해 주는데 한 몫한다. 책방의 이름에 걸맞게 '과몰입 도전'(20분 동안 책만 읽기) 이벤트가 상시 진행 중이며, 책방에 오는 사람 자체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과몰입러 인증'(과몰입대상 기재) 쪽지가 한쪽 벽면에 가득하다.
책장 맨 밑에 숨겨진 듯한 책을 구경하느라 쪼그려 앉아있는데 누군가 헐레벌떡 들어온다. 저분이 책방지기님이구나. 책방지기님은 가쁜 숨이 가라앉기도 전에 오늘 밸런타인데이라며 초콜릿을 건넨다. 낯선 이로부터 받은 예기치 못한 선물은 감동과 함께 온다. 선물은 언제나 혼자 오지 않는다.
책방지기님의 따뜻한 마음은 주머니에 간직한 채, 이동식 독립서점 북다마스에 대한 책 <이토록 작은 세계로도>를 펼쳤다. 과몰입 도전을 신청하자 20분으로 설정된 타이머가 내 책상 위에 놓였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몰입 시간은 20분이라는데, 듣도 보도 못한 특별한 이야기들로 인해 시간을 훌쩍 넘기고 나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간간이 손님들이 드나들었고 나처럼 들어와서 계속 책을 보는 손님도 한 명 있었다. 이후에 세 명의 손님들이 더 들어왔는데 책방지기님과 소곤소곤 이야기 나누는 걸 보니 서로 아는 사이인 듯했다.
"저희 저녁을 못 먹어서 배달시킬 건데 혹시 같이 드실래요?" 책방지기님이 들어온 지 한참 된 손님에게 속닥거렸다. '아, 여기 책방은 남아있는 손님과 음식을 같이 나눠먹기도 하나보다'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답변을 궁리 중이었는데 내 차례는 오지 않았다. 나한테는 먹을 거를 안 주려나 보다 하고 읽던 책을 계속 넘겼다. 재밌는 부분을 만날 때는 간혹 킥킥거리면서.
"20분 넘게 읽으셔서 과몰입 성공하셨기에 이거 드릴게요" 이번에는 나를 향한 말이다. 손바닥만 한 귀여운 과몰입상장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러면서 오늘 밥을 못 먹어서 피자를 시켰는데 저녁 안 먹었으면 같이 먹자고 하신다. 이미 준비해 둔 답이 있었기에 빛과 같은 속도로 덥석 제안을 물었다. 둘러앉을 자리를 마련하려고 테이블을 정리하는데 누군가 작가 운운한다. 여기 누가 작가 시냐고 물었더니 “우리 다 작가예요”라고 하신다. 우리 다??
책방지기님 2명, 책방지기님의 지인인 이정현 작가님, 또 다른 지인인 3명이 모두 작가라고 한다. 다들 독립출판물을 발행한 유경험자다. 졸지에 작가님들에게 둘러싸여 담소를 나누는 행운아가 되었다. <공간과몰입>은 오픈한 지 약 2년 정도, 본업(?)과 병행하기에 평일에는 수, 금요일만 오후 7시에 오픈을 한다. 그림책 <손> 작가님의 그림책을 읽어보고 즉석에서 ‘작가에게 묻다’도 해보고, 책방지기님과 지인분이 직접 작사/작곡하고 보컬까지 한 음악을 감상하는 시간도 가졌다. 이정현 작가님 덕분에 '북페어'라는 새로운 세상도 알게 되었다. 나도 이곳에 오게 된 여정과 책을 둘러싼 일상들을 하나 둘 꺼내었다. 만난 지 채 두 시간이 되지 않은 사람들과 한 시간 넘게 찐웃음 가득한 이야기가 계속되었다(이런 우리 모습이 유리창 너머에서는 어떻게 비쳤을까? 지나가던 인도 여행자들이 우리를 사진에 담았다).
독립책방에 발을 디디면 마감시간이 가까워야 겨우 나온다. 이번에는 작은 파티까지 있어서 운영시간이 종료된 이후에 나서게 되었다. 이정현 작가님과 함께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중에 작가님이 출판하신 책의 제목을 알게 되었다. <나의 작은 팔레트 1>, <나의 작은 팔레트 2>. 작가님 블로그의 책 소개 글에 매료되어 바로 구입하였다(나는 금사빠니까). 독립출판물이라 그런지 예상 배송일자가 7일 후이지만 기다림 조차 기쁨이다.
오늘은 사람이 아니라 책을 찾아왔다. <이토록 작은 세계로도>라는 새로운 책이 좋았고, 이 공간에서 함께 한 사람책은 더더욱 좋았다. <이토록 작은 세계로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책 보다 훨씬 입체적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