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근 후 퇴근 지하철까지 30분의 마법
매일 출근하는 회사가 아니라 회사 근처의 교육원에 가야 했다. 요즈음은 해야만 하는 쌓인 일들을 쳐내느라 딴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유럽여행 후 급격히 떨어진 체력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기에 반나절만에 체력이 방전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전에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여유시간을 확보하여 하고 싶은 일을 즐겼는데, 지금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해내는 것조차도 벅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방에 가고 싶었다. 주말이나 휴일에 시간을 내어 방문하는 책방도 좋지만, 잠시나마 지친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에 나를 두고 싶었다.
그렇게 찾은 곳이 ‘스페인 책방’이었다. 이름부터가 새롭다. 스페인 책방이라니, 인터뷰 글을 보니 우연히 짚은 스페인 책 한 권이 스페인 책방을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스페인을 좋아해서 스페인에 살고 싶은데 현실이 그럴 수 없으니 내가 있는 곳을 스페인으로 만들자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순간 떠오르는 문구.
행복은 장소가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본인이 만드는 것이죠.(소설가 강병융)
<태도의 말들>_엄지혜, 47p
내 행복의 유무와 정도를 장소 탓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어디에 있어서 좋은 것보다는 그곳에 머물렀을 때의 나의 마음 상태가 행복지수에 더 큰 영향을 미칠 텐데. 어디에서 무엇을 하느냐 보다 어떤 마음과 태도로 그 일을 하느냐가 핵심인데 이를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기는 말처럼 쉽지 않다. 폴란드에서 6시간 운전을 하고도 힘들지 않았던 건 그게 여행이라는 과정 중의 하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 돌아와 주말에 나가야 해서 운전을 하는데 힘겨워하는 나를 보더니 첫째 아이가 “여행할 때는 운전도 재미있었으니까 안 힘들었던 거 아냐?” 하고 묻는다. 아이의 눈에도 보이는 삶의 진리.
스페인 책방은 충무로역과 가깝다. 편의점이 있는 건물의 3층인데, 모르면 찾아가기 어려운 곳이다. 계단을 오르면서도 여기에 진짜 책방이 있나 싶다. 조심스럽게 3층의 마지막 계단에 발을 딛고 복도 끝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미소가 지어졌다. 책방의 분위기는 마음의 평온을 준다. 그래서 자꾸 책방을 찾게 된다. 작은 공간이라 재고 쌓아두는 곳을 따로 마련하지 못해서 일부는 재고라고 표시해 두었고, 3만 원 이상 구입하면 스페인 책방 여권 발급을 무료로 해주고 있었다(유료 구입도 가능하고, 책 구입 시마다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고 다 찍으면 선물 증정). 책방의 이름에 어울리게 스페인 및 스페인이 제국주의 시절에 지배한 중남미 국가 관련된 책이 반 정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가보지 않은 나라였고, 아직은 갈 생각이 없었기에 책의 제목만 가볍게 훑어보았다. 나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일반 책들에게 돌아갔다.
동네 서점/독립 책장/작은 책방을 사랑하는 나만의 방법은 단순하다. 그저 그곳에 있는 책을 구입하는 것이다. 시간이 조금 더 넉넉했다면 책을 직접 펼쳐보고 선택 하였겠지만 오늘은 그럴만한 여유까지 허락되진 않았다. 평소 읽고 싶었던 책목록에 있는 <쓰기의 말들>을 망설임 없이 들었다.
책을 구입하면서 책방지기님이신지 물었다. 책방지기님이라면 잠깐의 대화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여기도 <고호의 책방>과 같이 편안하게 말을 걸 수 있게끔 하는 메모가 있었다). 그런데 책방지기님은 다른 곳에 있다고 하신다. ‘아, 책방을 해도 줄곧 책방에만 있지는 않아도 되지’하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로 스페인 책방을 찾았다. 머무른 시간은 30분 남짓이었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음에 에너지가 채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쓰기의 말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 에너지는 더 크게 부풀어 올랐다. 책을 통해 깨닫고 채워진 에너지를 생활인으로서 내 삶과 어떻게 접목시킬까를 고민하는 요즈음이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그러는데, 내가 보니까 책 속에는 길이 없어요. 길은 세상에 있는 것이지. 그러니까 책을 읽더라도, 책 속에 있다는 그 길을 세상의 길과 연결을 시켜서, 책 속의 길을 세상의 길로 뻗어 나오게끔 하지 않는다면 그 독서는 무의미한 거라고 생각해요.(김훈)
<읽기의 말들> 박총, 20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