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소송이 아니라 소통이 필요했습니다

460명 가맹점주에게 보내는 한 장의 공지문

by 장유미 변호사

평소에는 생각이 많아야 한다

그러나 결단 앞에서는 단순해야 한다

옳은 결단은 언제나 내어주는 쪽이다

- 박노해, <결단 앞에서> 중에서






일촉즉발의 순간

갈등은 어느 날 갑자기 터지지 않습니다. 조용히, 꾸준히, 소리 없이 쌓이다가 어느 순간 임계치를 넘으며 폭발합니다. 이번 사건도 그랬습니다.

전국 460개 가맹점주가 참여하는 하나의 온라인 커뮤니티. 처음에는 애정 어린 피드백과 개선 제안이 오가던 공간이었습니다. 현장의 작은 불편, 운영상의 질문, 제도에 대한 건의들이 올라왔고, 점주들은 “그래도 본사는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본사의 답변은 늦어졌고, 질문들은 쌓여갔습니다. 점주들의 기다림은 불만으로, 누적된 불만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변해 갔습니다.

커뮤니티의 공기는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건설적인 제안 대신 날 선 표현이 늘어났고, “본사는 우리를 버렸다”는 말이 공공연히 오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대표이사님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변호사님, 이대로 가면 소송으로 번질 것 같습니다

대표이사님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역력했습니다. 이미 몇몇 점주들은 법적 대응을 언급하고 있었고, 본사 내부에서도 “이쯤이면 강경 대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표이사님은 달랐습니다. “점주들은 우리의 동반자입니다. 이길 수는 있겠지만, 이기고 나서 남는 것이 없는 싸움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말 한마디로, 이 사건의 성격은 분명해졌습니다. 이건 ‘법으로 풀 문제’가 아니라 ‘관계를 어떻게 다시 이어갈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함께 걷기 위한 언어를 선택했습니다

물론 본사 입장에서 유리하게 주장할 수 있는 법적 쟁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계약서, 책임 범위, 본사의 의무와 한계까지. 어디까지나 법의 언어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사안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표이사님의 의중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손익 계산이 아니라 신뢰의 단절이었고, 해결은 공격이나 방어가 아니라 언어의 전환에서 시작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소송도, 경고장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의 문서를 함께 쓰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대점주 공지문’이었습니다.


감정이 아닌, 책임의 언어로

이 공지문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숨기지 않을 것, 약속하지 못할 말은 하지 않을 것, 그리고 시간을 명시할 것.


공지문을 쓰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대표이사님은 여러 차례 원고를 고쳐 쓰셨고, 저희는 한 문장, 한 단어를 놓고도 오래 고민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점주를 ‘문제 제기자’가 아니라 ‘동행자’로 바라보는 언어인가.”


그래서 공지문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불만에 대한 해명이 아니라 함께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말로. 그리고 이어서, 지금까지 부족했던 점을 분명히 인정하고 현실적으로 실행 가능한 네 가지 개선 약속을 담았습니다. 책임질 수 없는 미래를 말하지 않고, 지금 당장 바꿀 수 있는 것부터 이야기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오래 고민 끝에 이렇게 정리되었습니다.

“본사 없는 점주도, 점주 없는 본사도 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배에 타고 있습니다.”


공지문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을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닙니다.

공지문 하나로 본사를 향한 원망과 분노의 공기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변화는 분명히 시작되었습니다. 점주들은 공지문에서 드러난 본사의 태도를 읽어냈습니다. 계속적인 불만을 토로하던 댓글의 톤이 달라졌고, “지켜보겠다”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본사는 소통 채널을 정비했고, 현장 간담회 일정을 공개했으며, 약속한 개선 사항을 하나씩 실행에 옮겼습니다. 팽팽하게 맞서 있던 양쪽의 입장은 서서히 합의 가능한 지점을 찾아갔습니다.


이 사건은 소송으로 가기 전에 정리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법원에서 판결로 끝난 사건이 아닙니다. 누군가 이기고, 누군가 지는 구조로 마무리된 것이 아닙니다. 신뢰를 회복하는 문장을 함께 쓴 것으로 해결된 사건이었습니다.


갈등은 때로 칼이 되지만, 때로는 서로를 다시 마주 보게 만드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갈림길에서 어떤 언어를 선택하느냐가 관계를 완전히 끊을지, 아니면 다시 이어 갈지를 결정합니다.


변호사의 마음에서

유노이아 법률사무소는 소송을 다뤄온 곳이지만, 그보다 소송으로 가지 않게 만드는 일에 더 큰 가치를 둡니다.


조정, 중재, 협상, 합의.

법의 언어를 사람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

싸움이 아니라, 함께 걷기 위한 구조를 설계하는 일.


이번 사건은 유노이아의 철학이 그대로 드러난 사례였습니다.

“우리는 싸움을 중재한 것이 아니라, 함께 앞으로 걷기 위한 소통을 설계한 것이었습니다.”


그 길의 한가운데에서, 오늘도 저는 변호사로 서 있습니다.


유노이아 법률사무소 장유미 변호사입니다.




법과 삶, 그리고 문학이 만나는 자리.
한 편의 시와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유노이아의 법률 에세이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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