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회사에 빌려준 돈, 대표이사에게 받을 수 있나요

연대보증인 서명란의 부재가 남긴 균열

by 장유미 변호사

우리는 오랫동안 반응했다 우리는 싸움을 두려워했고 결론을 조심했고 뒤바뀌길 바라면서 함부로 예상하고 있었다

- 정영효, <최소한으로> 중에서






15년 넘게 알고 지낸 형님

그분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장님이셨습니다. 업계에서 나름 인정받는 회사를 성실하게 꾸려가고 계셨습니다. 그런 그분에게는 15년 넘게 알고 지낸 같은 업계의 형님이 계셨습니다. 외동아들이었던 그분에게 그 형님은 진짜 친형 같은 존재였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여행도 다니고, 명절이면 서로의 집을 오가며 안부를 나눴습니다. 단순한 사업상 인맥을 넘어서, 삶의 희로애락을 나누는 관계였습니다.


"사업자금이 필요하다"는 말

그러던 어느 날, 형님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사업자금이 필요한데... 혹시 돈을 좀 빌려줄 수 있을까?"


금액은 자그마치 2억 원.
그분 역시 빠듯하게 사업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형님의 요청을 그 자리에서 바로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중소기업을 운영한다는 건 늘 줄타기와 같아서, 아무리 자금 흐름을 관리해도 예기치 않은 변수로 한순간에 막혀버리기도 합니다. 같은 업계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그분 역시 이러한 상황을 잘 알기에, 오죽하면 형님이 돈 이야기를 꺼냈을까 싶었습니다. 3박 4일을 고민한 끝에, 그분은 결국 돈을 빌려주기로 했습니다.


3개월이면 된다던 말을 믿었는데

자금을 빌리기 전 그 형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잠시 자금흐름이 막혀서 비상용으로 필요한 거야. 3개월 이내에 정상화될 예정이니까 바로 갚을게."


그래서 계약서를 작성할 때만 해도 그저 형식만 갖춰둘 생각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3개월이 6개월, 1년, 2년으로 늘어나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미안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던 형님의 태도는 시간이 갈수록 뻔뻔해지기만 했습니다. 돈을 돌려받아야 할 정당한 권리가 있는 사람은 그분인데, 오히려 죄송한 마음으로 "언제쯤 가능할까요"라고 물어야 하는 굴욕적인 순간들이 쌓여갔습니다. 화를 내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건 공허한 사과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오랜 세월 형제같이 지냈던 형님이기에, 선뜻 소송을 제기하기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보낸 내용증명이 묵묵부답으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15년 우정이 끝났음을 직감하고 제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계약서의 존재, 그러나 온전하지 않은 형식

보통 이런 금전거래에는 계약서조차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사안에서는 계약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회사 대 회사의 거래였고, 만약 회사가 변제하지 못하면 대표이사가 연대보증을 한다는 조항도 분명히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서명의 형식이었습니다.


그분이 내민 금전소비대차계약서 한 장을 찬찬히 살펴본 저는 난감했습니다. 회사 두 곳과 연대보증인인 대표이사 개인까지 포함하면 세 명이 얽혀 계약이었는데, 서명날인란은 단 두 곳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형식만 갖춰두자'는 형님의 말에 이 계약서의 서명날인란에는 회사만 있었습니다. 대표이사가 연대보증인으로서의 서명날인을 한 공간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회사를 상대로 한 청구는 100% 승소를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대표이사 개인에 대한 책임이었습니다. 회사가 이미 자금 능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회사만을 상대로 승소한다는 건 사실상 2억 원을 회수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너무 쉽게 사람을 믿은 건가요?”

그 질문에는 억울함보다 허탈함이 더 많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분의 호의가 배신이 되어 돌아온 이 상황을, 저는 법의 언어로 바로잡고 싶습니다. 15년 넘게 쌓아온 신뢰가 단 한 장의 계약서 앞에서 무력해지는 순간. 형님이라 믿었던 사람이 법적 허점 뒤로 숨는 순간을 다시 바로 세우고 싶습니다.


계약서의 내재된 흠결로 인해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1장짜리 계약서, 단 7개 조항뿐인데 개인의 연대보증조항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그 내용을 확인했을 것이고, 알면서도 별도의 서명날인란을 만들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회사의 대표이사로서의 서명날인이 개인의 연대보증인으로서의 서명날인을 겸한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고. 물론 법리적으로는 쉽지 않은 다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가능성을 붙잡고 이 길을 걸어가려고 합니다.


변호사의 마음에서

저는 이런 상황을 너무 자주 맞닥뜨립니다.

계약서를 썼다는 이유로 안심하지만, 막상 분쟁이 생겼을 때 그 계약서가 온전히 지켜주지 못하는 경우를요. 계약서 작성에 반드시 변호사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만, 사전 검토 없는 계약서는 일이 틀어졌을 때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남깁니다. 이 사안에서도 중소기업 사장님인 그분은 현장의 사업에 집중하다 보니 계약서 하나하나를 꼼꼼히 검토할 여력이 없으셨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기업 내부에서 일하면서 계약서 하나가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 지켜봐 온 사람입니다. 문제가 생긴 뒤의 수습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전에 가능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구조를 보는 만드는 일. 이는 사후 대응보다 조용하지만, 결과는 훨씬 결정적입니다


유노이아는 중소기업 사장님들이 법적 위험에 노출되기 전에 미리 예방할 수 있도록 돕는 파트너가 되고자 합니다. 계약서 검토, 거래 구조 설계, 분쟁 예방 컨설팅까지.


유노이아 법률사무소 장유미 변호사입니다.




법과 삶, 그리고 문학이 만나는 자리.
한 편의 시와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유노이아의 법률 에세이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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