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대응하지 않은 소송이 남긴 것

무변론판결 이후, 뒤늦게 시작된 채권추심

by 장유미 변호사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슬퍼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삶에서 잘못 들어선 길이란 없으니

- 박노해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중에서





날아온 소장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분은 상담실에 앉자마자 판결문을 내밀었습니다. 그분이 피고였고, 원고의 청구금액 3,000만 원은 전부 인용되어 있었습니다. 단 두 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판결문에는 ‘무변론판결’이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대응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법원에서 소장이 날아온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만큼 바쁜 시절이라 법원에 서류 한 장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재판이 열렸고, 그분의 목소리는 법정에 닿지 못했습니다. 무변론판결은 피고가 소장을 받고도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은 경우에 내려지는 판결입니다. 이 경우 법원은 원고의 주장과 제출된 자료만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판결은 패소했지만, 채무는 사라졌습니다

판결은 완전한 패소였습니다. 원고의 청구금액 3,000만 원 전부가 인용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시간은 법정 밖에서 흘러갔습니다.

물류비 지급 문제로 시작된 갈등으로 인해 소송까지 갔지만 결국은 대화를 통해 정리되었고, 원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 그만 정리하죠. 더는 갚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랜 거래 관계 속에서 나온 말이었기에 그분은 판결문의 효력보다는 그 말을 믿었습니다. 그 후 몇 해가 흐르면서 이 일은 기억 속에서도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통장 압류, 원고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판결문을 근거로 채권압류 및 추심명령이 날아왔습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채권압류 및 추심명령에 적힌 채권자가 원고가 아니라 채권추심업체였습니다. 판결문과 다른 이름, 그 순간 그분은 혼란스러웠다고 했습니다.

“분명 원고랑은 좋게 끝났는데요.”


판결문의 원고와 다른 사람이 채권압류 및 추심명령의 채권자가 되려면 반드시 필요한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채권양도’입니다. 원고가 자신의 채권을 제3자에게 넘겼다는 사실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채권양도는 채무자에게 통지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채권양도 통지를 받은 기억이 전혀 없다고 하였습니다. 원고 역시 채권추심업체에게 추심을 위임한 적은 있지만 채권자체를 양도한 적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면 의심은 하나로 모였습니다. 채권추심업체가 원고에게는 추심 불가로 사건을 종료해 놓고, 실제로는 자신들이 채권자인 것처럼 행동하며 권리를 행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조심스러운 추측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의심이었습니다.


허용된 추심, 허용되지 않은 방식

채권추심업체의 의심쩍은 행동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채권추심업체는 그분에게만 독촉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동생에게까지 변제를 요구했다고 했습니다. 반복되고 집요하게 이어지는 연락에 결국 동생은 버티지 못하고 1,000만 원을 변제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은 원고에게 전달되지도 않았습니다. 원고는 그런 변제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채권추심은 허용된 영역이지만, 법은 분명한 한계를 두고 있습니다. 채무를 변제할 법적 의무가 없는 사람에게 대신 갚으라고 요구하여 공포심이나 불안감을 유발하는 행위는 금지됩니다.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형사처벌까지 가능한 사안입니다.

또한, 채권추심업체가 정상적인 업무를 하였다면, 어찌 되었든 원고 몫으로 변제받은 금액을 원고에게 전달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원고에게는 일부 변제된 사실을 함구하였다는 것 자체가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하였습니다.


이제는 흐름을 멈춰야 할 시점입니다

소송은 상대가 시작했을 때보다 내가 침묵했을 때 훨씬 더 위험해집니다. 그분의 지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지금부터의 시간은 분명히 멈출 수 있습니다. 지금의 문제는 ‘누가 채권자인지’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채권추심업체가 아니라 원고입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원고를 통해 사실관계를 정리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채권이 실제로 양도되었는지, 일부 변제 사실이 왜 전달되지 않았는지. 동시에, 채권추심업체가 동생에게 변제를 요구한 행위에 대해서는 법적 책임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분쟁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화를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써요.


때로는 선을 분명히 그은 이후에야 비로소 협상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변호사의 마음에서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어진 채권추심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출발점에는 단 한 번의 무대응이 있었습니다. 소장이 가진 무게를, 그분은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사업에 집중하느라 법의 시간을 뒤로 미뤄두었을 뿐이었는데 그 시간은 무거운 이자가 붙어서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그분이 더 이상 판결문 한 장 앞에서 혼자 흔들리지 않도록 이 관계를 다시 정리하려 합니다. 늦었다고 느껴질 때가 사실은 가장 정확한 개입의 시점일지도 모릅니다.


유노이아 법률사무소 장유미 변호사입니다.



법과 삶, 그리고 문학이 만나는 자리.
한 편의 시와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유노이아의 법률 에세이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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