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할지급계약서에 없었던 단 한 줄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중에서
"변호사님, 제가 너무 사람을 믿었던 거겠죠."
첫마디였습니다.
자리에 앉으시기도 전에 나오신 말이었는데, 그 말 한 문장에 그분의 상황이 모두 담겨 있었습니다. 이미 많은 시간을 혼자 고민하고 오신 듯했습니다.
그분은 상대방에게 주식을 넘기셨습니다. 대가는 1억 원이었습니다. 한 번에 돈을 다 받을 수도 있었지만, 1억이라는 돈이 누군가에게는 한 번에 내기 어려운 금액 일거라는 생각에 매달 500만 원씩, 20개월에 나눠 받기로 하였습니다.
그분의 배려는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계약은 체결했지만 바로 갚으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석 달 뒤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상대방도 하던 일을 정리하고 자리 잡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으니까요.
그 석 달 동안, 그분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첫 지급일이 왔습니다. 돈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연락을 했더니 상대방이 말했습니다. “사정이 생겼다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꼭 갚겠다고.” 그 말을 믿으셨습니다. 한 번 더 기다리셨습니다. 두 번째 달도 오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달도요.
카카오톡 답장은 점점 늦어졌습니다. "신경 쓰고 있어요." "이번 달은 어렵고요." "다음 달엔 꼭요." 날짜도 없고, 금액도 없고, 계획도 없는 말들이 반복됐습니다. 전화를 하면 잘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상대방이 본인이 운영하는 법인 브랜드를 앞세워 개인적인 수익화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분은 그 소문을 들으시고,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다고 결심하셨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었을 때,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전액 청구, 가능하겠다고.
그런데 계약서를 펼쳤을 때 멈췄습니다. 기한이익 상실 조항이 없었습니다. 분할지급계약에서 기한이익 상실 조항이 있으면, 연체했을 때 나머지 금액 전부를 한꺼번에 청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구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상대방이 꼬박꼬박 갚겠다는 말을 믿으셨기 때문에, 그분은 그 한 줄을 쓰지 않으셨던 겁니다.
계약서의 구조만 놓고 보면, 지금 청구할 수 있는 돈은 세 달치, 1,500만 원뿐이었습니다. 그분은 제 표정을 읽으셨는지 물으셨습니다.
"혹시... 전액은 어렵나요?"
저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길이 있습니다."
법에는 ‘이행거절’이라는 법리가 있습니다. "안 갚겠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태도와 정황이 쌓여서, 이 사람이 갚을 생각이 없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상황이라면, 법원은 잔액 전부에 대한 청구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 사안에서 상대방은 말로는 계속 갚겠다고 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이행거절이 아닐 수 있으나, 그 말들은 오로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방어막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 말들을 거꾸로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말’이 아니라 ‘기록’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먼저 내용증명을 보냈습니다.
단순한 독촉이 아니었습니다. 기한을 정해 명확하게 전달했습니다. 이 시점까지 이행하지 않으면, 계약 이행 의사가 없는 것으로 보겠다고. 이 문서 하나가, 이후 이행거절 판단의 기준점이 됩니다. 마지막 기회를 줬다는 사실이 법적으로 기록되는 절차이기도 했습니다.
그다음은 카카오톡 대화를 정리했습니다. "신경 쓰고 있어요", "시간이 필요해요"라는 말들이 몇 달에 걸쳐 반복되는 동안, 단 한 번의 입금도 없었습니다. 구체적인 날짜도, 금액도, 계획도 없었습니다. 그 메시지들을 시간순으로 나열하면 무언가가 보입니다. 갚겠다는 말이 실제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것이요.
마지막으로, 상대방의 경제활동 자료를 확보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못 갚는다는 사람이, 실제로는 수익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는 자료가 아니었습니다. 갚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갚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결국, 돈을 갚을 의사가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였습니다.
계약서에 조항 하나가 없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법은 계약서의 문구만 읽지 않습니다. 그 문구 바깥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함께 봅니다.
이 사건에서도 재판부는 분할지급이라는 형식보다, 그 사이에 축적된 태도를 보았습니다. 재판부가 그분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해서 계약서에 없던 문구가 새로 생긴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미 존재하던 사실관계가 법리 안에서 정리되었을 뿐입니다.
이제 그분 앞에는 집행의 절차가 남아 있습니다. 오랜 기다림은 법적으로 정리되었습니다. 더 이상 상대방의 말에 기대어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는 권리를 현실로 만드는 실행의 단계입니다.
유노이아 법률사무소 장유미 변호사입니다.
법과 삶, 그리고 문학이 만나는 자리.
한 편의 시와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유노이아의 법률 에세이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