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 이후 발견된 가등기
무게중심이 밖에 있으면 건물은 무너진다.
피사의 사탑 무게중심은
여전히 건물 안에 있다.
그래서 무너지지 않는다.
내 삶의 중심도 내 안에 있기를.
- 하상만, <중심> 중에서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삶이 있습니다. 복잡한 도시의 소음을 뒤로하고, 아침이면 파도 소리에 잠을 깨는 삶. 그분에게 제주도 1년 살기는 인생의 쉼표이자 그동안 앞만 바라보며 내달렸던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 같은 계획이었습니다. 연고 하나 없는 제주도였지만, 그분은 용기를 내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집 한 채를 장기 렌트했습니다.
이웃들은 처음에 그분을 '육지 사람'이라 불렀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그 단어가 묘한 경계심처럼 느껴져 낯설기도 했지만, 집주인의 친절은 그 벽을 금세 허물어뜨렸습니다. 집주인은 혼자 온 그분에게 제주 생활의 소소한 팁을 알려주며 정착을 도와주었습니다. 어느덧 두 사람은 차 한 잔을 나누며 서로의 가정사까지 터놓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1년으로 계획했던 제주 살이는 그렇게 2년, 3년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만큼 그곳의 자연과 사람, 그 사이에서 묻어 나오는 정이 좋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주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갑자기 급하게 돈이 필요한데, 1,000만 원만 빌려줄 수 있을까요? 15일 후에 들어오는 돈이 있는데, 그때 바로 드릴게요."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3년을 넘게 봐온 이웃이자 집주인이고, 고마운 마음도 컸기에 흔쾌히 돈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러나, 약속한 15일이 훌쩍 넘어 30일이 지나도 집주인은 돈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혼자 속만 끓이면서 몇 달이 흘렀고, 그분은 뒤늦은 독촉을 하셨다고 합니다. 처음엔 "곧 드릴게요"라던 집주인이, 어느 순간부터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에는 이런 말까지 꺼냈다고 합니다.
"그거, 빌려준 게 아니라 그냥 준 거 아닌가요?"
3년의 정이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그분은 어떻게든 조용히 끝내 보려고 했습니다. 제주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그 아름다운 기억에 먹칠을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독촉도 해보고, 엄포도 놓아보고, 다시 한번 사정도 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침묵이거나 뒤집힌 말 뿐이었습니다. 결국, 소송을 제기하였고 1심에서 이겼지만 상대방이 항소하여 2심까지 거쳤습니다. 판결이 확정되기까지 꼬박 2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천만 원을 빌려준 날로부터는 이미 3년이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판결문을 가지고 강제집행을 준비하던 중에 상대방 소유의 유일한 부동산에 소유권이전청구권가등기가 되어 있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상대방은 대여금 소송 1심에서 패소한 이후 2심 판결이 선고되기 직전에 자기 부동산을 처분하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이제… 돈을 못 받는 건가요?”
저는 서류를 다시 들여다보았습니다. 가등기의 채권자 이름과 생년월일을 읊자 그분이 불현듯 말씀하셨습니다.
“왠지… 아들 같아요.”
집주인의 큰아들이 자주 드나들었다고 했습니다. 가등기의 채권자 이름이 큰아들 이름은 아니지만, 돌림자를 쓰는지 끝자리가 비슷하고, 나이대도 얼추 맞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확신은 없었고 단지 느낌이었지만, 그 느낌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단서가 아니었습니다.
"사해행위 취소 소송을 진행해 봅시다. 쉬운 길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길도 아닙니다."
채무자가 자신의 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채권자의 집행을 피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사용할 수 있는 절차가 바로 사해행위 취소 소송입니다. 이 소송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채권의 존재, 재산 이전의 시점, 채무자의 재산 상태, 수익자의 악의를 모두 입증해야 합니다.
저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동시에 가족관계 사실조회 신청을 진행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가등기 수익자가 정말 아들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아들이라고 밝혀질 경우 가족 간 거래로서 수익자의 악의가 추정되어 소송에서 유리한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법원을 통해 채무자의 재산과 채무 상태를 확인할 계획이었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싸움입니다. 하지만 의심이 되는 정황상 불가능한 싸움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소송을 시작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땅한 권리를 공식적으로 확정 짓는 데 2년이 넘게 걸렸어요. 그 시간도 기다렸는데,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죠."
지치지 않는 기다림이란, 결국 자신의 정당함을 믿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그분을 위해 저도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그분의 기다림을 조금이라도 줄여드리고 싶었습니다.
판결문을 손에 쥐는 순간, 많은 분들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법은 판결문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판결 뒤에는 집행이 있고, 집행 앞에는 또 다른 장애물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판결은 끝이 아니라 권리를 현실로 만드는 과정의 시작이고, 이번 사건에서도 우리는 그 시작점에 서 있습니다.
소장은 이미 접수되었습니다. 가족관계 사실조회도 함께 신청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사건의 방향은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 흐름의 끝에서 그분의 권리를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 것입니다. 그분의 아름다웠던 제주 생활이, 끝까지 아름다운 기억으로 마무리되기를 바랍니다.
유노이아 법률사무소 장유미 변호사입니다.
법과 삶, 그리고 문학이 만나는 자리.
한 편의 시와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유노이아의 법률 에세이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