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송창식 가수의 노래 중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중략)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삼등 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중략)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노래를 즐겨 흥얼거린다. 내 고향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 학창 시절 교회를 다녔다. 친구 권유로 갔었지만 그게 인연이 되어 지금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여름이면 교회학생회에서는 여름수련회를 갔다. 우리들의 단골 여름수련회 장소는 옥계해수욕장이었다. 옥계해수욕장은 기차를 타고 이동하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재미를 더했다. 그곳도 개발되어 지금은 시멘트와 석유를 수출 수입하기 위한 선박이 정박하는 커다란 항구로 변해버렸다. 예전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길게 뻗은 콘크리트 방파제 위에 홀로 서 있는 등대를 보노라면 왠지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기이한 작품처럼 보인다.
과거 옥계해수욕장은 바닷물의 깊이가 얕아 어린아이들도 위험성이 낮았고 백사장의 넓이 또한 길고 넓어 백사장에서 달리기도 우리에겐 좋은 게임메뉴였다. 바다와 근접한 백사장을 따라 물을 튀기며 달리는 기분은 정말 최고였다. 옥계해수욕장 주변에 특이하게도 민물이 해수욕장 가운데를 가로질러 흘렀다. 그리고 나룻배가 이동 수단으로 있었다. 우린 늘 나룻배를 타고 건너가 모래밭에 텐트를 쳤다. 텐트를 치는 건 늘 남학생들 몫이었다. 남자들 일부는 주변에 버려진 나무 조각을 주워야 했다. 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쌀을 씻어주고 반찬을 정리해 주는 것 외에는 여학생들은 짐을 정리하고 텐트 속에서 옷을 갈아입고 대기했다. 그때부터 여학생들의 천국이다. 지금 여성시대가 그때 시작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집에서는 말도 안 듣던 녀석들도 수련회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노력 봉사에 손발이 척척 맞고 큰 돌로 기둥 세우고 대형 솥을 올리고 나무로 불을 때 밥도 잘했다. 신기하고 재미도 있었다.
그때는 한번 쓰고 버리는 용기가 없을 때라 국도 큰 그릇 몇 개에 나누어 주면 서로 숟가락이 들락거려가며 맛있게 먹었다. 위생 개념도 없었고 바이러스라는 단어도 몰랐다. 식사 후 설거지도 당연히 남학생들 몫이다. 평소 집에서 하지 않았던 일지만 수련회에서는 전부 설거지 선수다. 한번은 마지막 날 국을 끓여야 하는데 재료가 없어 우리는 궁리 끝에 수박껍질로 호박국처럼 요리해 보기로 했다. 친구 몇 녀석이 주변을 다니며 쓰레기 더미에서 쓸만한 크기의 수박껍질을 주워서 왔다. 나는 정성 들여 호랑이 무늬 껍질을 벗겨냈다. 호박이나 수박이나 성질이 같다고 생각해 대충 칼로 잘라 솥에 넣고 푹 끓여냈다.
“호박국이 왜 이리 단맛이 나지?”하고 여학생들은 물었지만 우린 묵비권을 행사했다. 모두 식사가 끝나고
“ 응 그건 주워 온 수박으로 한 작품이라 그래” 고백하고 한바탕 웃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머리카락 색이 변해도 고향의 바다는 늘 그대로다. 파도 소리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생각난다. 먼 거리에서 눈에 보일 듯 말 듯 잔잔하게 굴러오며 서서히 둥근 원을 크게 만드는 파도가 신비하다. 바람에 의한 바다의 움직임이라고 한다. 바다는 언제 보아도 든든하다. 엄마의 품처럼 잔잔하고 아빠의 든든한 어깨처럼 웅장하다. 백사장의 모래알은 진주처럼 빛나고 바다에 비친 태양의 떠오름은 사람을 긴장시키며 일으켜 세운다. 난 바다가 좋다. 넓어서 좋고 깊어서 좋다. 자연의 이치대로 움직이며 말이 없어 더 좋다. 나 역시 생각을 바다처럼 깊게 하고 싶다. 주어진 삶에 폭은 넓게 자족하며 입술을 무겁게 침묵하며 살고 싶다. 내 고향 동해의 바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