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송창식 가수의 노래를 좋아한다. 그의 노래 중 ‘고래사냥’은 바다를 표현하고 있어 자주 흥얼거리게 된다. 그중에서도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삼등 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중략)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는 고향을 생각나게 한다. 내가 난 곳은 강원도 묵호읍 진 2리 89번지 지금은 동해시라 불리는 곳이다. 1980년 명주 군 묵호읍과 삼척 군 북평읍이 합쳐져 이루어진 약간은 이질성이 있는 행정구역이다. 두 곳에는 망상해수욕장과 송정해수욕장이라는 유명해수욕장이 있었다. 수평선 너머에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며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장소였다. 학창 시절의 여름방학이면 두 해수욕장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지금 송정 해수욕장이 있었던 곳은 국제항구로 개발되었다. 한쪽 부두는 일반선박 한쪽에는 해군 1 함대 소속 군함이 정박하고 있다. 다행히 망상해수욕장은 자연 그대로 보전되어 많은 피서객이 찾아오는 바다 명소가 되어있다. 난 지금도 기회만 되면 고향을 가고 바다를 찾는다. 마음의 안식처이면서 가슴속 응어리를 버리고 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난 교회를 다녔다. 친구가 여학생이 많다는 말에 친목회 모임을 핑계로 가게 되었지만 그게 인연이 되어 지금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교회학생회는 중학생인 우리가 주축일 정도로 작은 교회였다. 여름방학이면 교회학생회에서는 여름수련회를 갔다. 학생회 여름수련회는 공식적으로 부모님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가 허락되는 기간이었다. 남녀 칠 세 부동석이라는 개념이 있을 때였지만 교회 수련회는 이것을 넘어설 수 있었다. 평소에 절대 허락받을 수 없었던 숙식이 야외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눈치만 살피며 여학생들에게 말을 걸어볼 시간이 없던 개구쟁이들에게는 터놓고 이야기 붙여볼 기회다. 나 역시 집을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어서 너무 좋았다. 친엄마가 아니라 불편한데 자유를 누릴 수 있어 좋았다. 대화를 할 수 있는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밤을 설치게 했다. 우리의 단골 여름수련회 장소는 옥계해수욕장이었다. 망상해수욕장은 십리 길이었지만 같은 지역이어서 걸어서 가야 했다. 무더위에 걸어서 짐을 메고 수련회를 간다는 건 고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꾀를 내어 교회 건의를 했다. 망상해수욕장은 전국에서 피서객이 오므로 수련회 장소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옥계해수욕장으로 결정됐다. 옥계는 관외 지역이라 기차를 타는 이동하는 재미가 매력이 있었다. 기차 안에서 달걀 꾸러미 파는 제복 입은 아저씨에게 달걀도 사서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신나게 부르다 보면 옥계역에 기차는 정차했다.
옥계해수욕장은 바닷물의 깊이가 얕아 어린아이들도 위험성이 낮았고 백사장의 넓이 또한 길고 넓어 백사장에서 달리기도 우리에겐 좋은 게임메뉴였다. 바다와 근접한 백사장을 따라 물을 튀기며 달리는 기분은 정말 최고였다. 옥계해수욕장 남쪽에는 특이하게도 민물이 해수욕장 가운데를 가로질러 흘렀다. 다리가 없을 때라 나룻배가 이동 수단으로 있었다. 우리의 수련회 장소는 남쪽으로 나룻배를 타고 건너가 조용한 모래밭에 텐트를 쳤다. 텐트를 치는 건 늘 남학생들 몫이었다. 남학생들 일부는 주변에 버려진 나무 조각을 주워와야 했다. 점심 식사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침에 출발할 때 집에서 탈출하는 게 마음 바빠서 다들 배가 고팠다. 하지만 여학생들은 쌀을 씻어주고 반찬을 정리해 주는 외에는 텐트 속에서 옷을 갈아입고 수다를 떤다. 그때부터 여자들의 천국이다. 지금 여성시대가 그때 시작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집에서는 말도 안 듣던 녀석들도 여름수련회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노력 봉사에 손발이 척척 맞는다. 큰 돌로 기둥 세우고 대형 솥을 올리고 주워온 나무로 불을 때고 밥도 잘했다. 나 역시 신나게 일하고 재미도 있었다. 난 엄마가 외출하시면 집에서 연탄불로 밥을 한 경력은 있다. 식구 수가 적으니 솥도 작았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형 솥에 나무로 불을 때서 밥은 처음이었다. 솥의 밑은 누룽지가 더덕더덕 위는 조금 설익은 느낌의 밥이었지만 시장이 반찬이라 다들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배식 때면 피난민 숙소처럼 무더기로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1회 용기가 없을 때라 국도 큰 그릇 몇 개에 나누어 배분하면 서로 숟가락이 들락거려 가며 맛있게 먹었다. 위생개념도 없었고 바이러스라는 단어도 생소할 때였었다.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도 당연히 남학생들 몫이었다. 왜 그랬나 모르겠다. 여학생들에게 점수 얻으려 그랬나 싶기도 하지만 지도교사로 동행하신 분의 명령에 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교회 수련회는 규율이 엄격했다. 남학생과 여학생 간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에 민감했다. 그러나 자유시간도 있어 선배들의 기타에 맞추어 진주조개잡이를 부르며 술래잡기도 했다. 은근히 좋아하는 여학생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며 약을 올리는 것도 재미있었다. 수련회 마지막 날 난감한 일이 생겼다. 국을 끓여야 하는데 재료가 없어 우리는 궁리 끝에 수박껍질을 벗겨 국을 호박국처럼 내기로 했다. 친구 몇 녀석이 주변을 다니며 쓰레기더미에서 쓸만한 크기의 수박껍질을 주워왔다. 나는 정성 들여 호랑이 무늬 껍질을 벗겨냈다. 호박이나 수박이나 같은 박과이니 성질이 같다고 생각했다. 칼로 호박 자르듯 잘라 솥에 넣고 푹 끓여냈다. 호박이 왜 이리 단맛이 나냐고 여학생들은 물었지만 우린 묵비권을 행사했다. 식사가 끝나고 주워온 수박으로 한 작품이라고 고백했다. 여학생 중에는 속이 이상하다며 웩웩거리기도 했지만 우린 한바탕 웃으며 수련회의 추억을 하나 더 만들었다.
바다를 자주 찾지는 못한다. 그러나 바다는 늘 그립다. 파도 소리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생각난다. 먼 거리에서 눈에 보일 듯 말 듯 잔잔하게 굴러오며 둥근 원을 크게 만드는 파도가 신비하다. 바람에 의한 작용이라고 하지만 난 학설을 믿고 싶지 않고 순수하게 호기심으로 각인되어 있는 어릴 때 생각 그대로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다. 바다가 좋다. 넓어서 좋고 깊어서 좋다. 자연의 이치대로 움직이며 말이 없어 더 좋다. 파도가 바위에 부서져도 바다는 늘 그대로이다. 한결같은 바다 나도 자연에 순응하며 정직하게 살다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