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26 돌아오는 길에
달리는 차 안에서 내다보는 바깥 풍경은 여린 슬픔을 남기고 갔다. 가까이 있는 것들은 눈 깜빡할 사이에 멀어져 가고 멀리 있는 것들은 오래도록 머물다가 저물었다. 당연한 물리 법칙이 우리 인생과 너무나 닮아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게 물리는 기피 과목 중 하나였지만, 동시에 가장 흥미로웠다. 오래 전, ‘물리’라는 것을 처음 배웠을 때, ‘시간’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효율적인 고문 기구 같다고 생각했다.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흘려보내게 만들고 멀리 있는 것들을 바라보게 한다. 달리는 차 안에서는 지나치는 가로수 하나하나를 모두 무겁게 여기지 않듯이 인생에서 우리는 가장 가까운 순간들을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 매일 오는 아침을 기억하지 못하 듯이, 매일 보는 사람들의 옷과 표정과 그들과 나누었던 말들을 기억하지 못하 듯이, 그들과 보내는 찰나의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 듯이, 매일 나누었던 인사와 안녕을 기억하지 못하 듯이. 시간을 그렇게 무심코 떠나보내고 나서 한참이 흐른 후 다시 돌아보는 날에, 내가 보낸 시간들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을까봐 가끔 두려워지기도 한다.
차 안에서 바라보던 산들 앞에 수없이 지나쳤던 가로수들이 생각났다. 셀 수 없이 많은 가로수와 신호등과 차들을 시야에서 당연한 듯 지워내고 바라보았던 산들에는 무엇이 있는지 정작 알 지 못한다. 그래서 ‘후회없는 시간’을 보내라는 말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떳떳한 시절을 보낼 수 있을까. 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즐기려고 애썼다. 불꽃놀이를 볼 때, 사실 어떤 감정을 느껴야 되는지 모른다. 학교 축제에서 학생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무슨 감정으로 어떤 반응하며 감상해야 하는지를 의식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 순간을 즐기는 척 애쓴다. 그러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턱과 광대가 저리도록 웃고, 두 손이 빨개지도록 박수를 쏟아낸다. 귀신이라도 씌인 것처럼. 사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귀가 울리도록 큰 음악소리와, 너무 밝아서 눈이 찡그려지는 조명 밑에 옹기종기 수백명의 아이들과 함께 앉아있다는 느낌 말고는 크게 요동치는 감정은 없다. 조금… 공허하기도 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기억도 하지 못할 무대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공연은 오르는 사람에게 한 번뿐이지만 관람하는 사람에게 그 공연은 그저 많은 공연 중 하나이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여운보다는…정말 머리속에서 공명하는 깊은 공허함이 온다.
학업도 그러하다. 성적이 높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새벽까지 엉덩이 붙이고 졸려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떠가며 책장을 넘겼던 날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후회가 남는다. 하얀색 셔츠 위에 노랗게 때가 끼 듯, 더럽고 찝찝하다. 도대체 어떤 노력이 후회없는 노력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열심히 해서 받은 성적이 쪽팔렸고 그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부질없음을 몸소 체험했다. ‘시간’이 나를 매일 고문한다. 더디지만 착실하고, 정확하지만 막연하다. 지금 고등학교 3학년의 시간이 평생 갈 것처럼 느껴지지만 어느새 마지막 10대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믿기지 않는다. 모든 어른들이 지금은 미래만을 보고 뛰어야 할 시기라고 말해주고 나도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늘 그래왔 듯이 나는 과거가 자꾸 눈에 밟히고, 그래서 현재가 버겁고, 미래는 아득하다. 지금 내 나이 모든 아이들이 그렇겠지. 창창한 나이라고 하지만 그래서 더 불안정하고 연약한 단계라고 생각해본다.
달리는 차 안, 밖에서는 모든 게 부질없이 지나가도 내 옆에서 앉아있는 사람의 기척을 느끼면서 편안히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본다. 그곳에 존재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다른 창문이라도 같은 풍경을 보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그렇게 내 앞에 지나가는 풍경들을 조용히 눈을 감고 흘려보내 본다. 풍경을 지나보내며 언뜻언뜻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사람이 너였으면 좋겠다. 아침에 출발해, 정오를 지나 해가 뉘엿뉘엿 지는 황혼에도 너가 보였으면 좋겠다. 태양이 마지막 낮의 열기를 보내며 가장 뜨겁게 빛나고, 창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는 사람이 너였으면 좋겠다.
밖에 모든 게 지나가도 차 안에서 같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너의 손을 잡고, 비록 다른 풍경을 바라보는 너를 안고, 조용히 속삭이는 농담들에 자지러지게 웃으면서 그렇게 모든 것을 흘려보내도 괜찮다고 느낀다. 모든 길을 지나, 마침내 도착점에 이르게 되었을 때, 창문에서 들어오는 바람에도 꺄르르 거렸던 우리를 돌아보며, 그렇게 또 똑같이 웃으면서 차 안에서 내렸으면 좋겠다고. 그런 어렴풋한 생각에 잠기며 얕은 잠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