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자식
나한테 애증을 설명하라고 묻는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부모와 자식'이다.
부모를 증오한다고? 비윤리적이고 괘씸한 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도 한 때 그렇게 생각했었고.
나는 우리 부모님을 사랑한다. 물론 그들이 나를 끔찍하게 아낀다는 것도 안다. 대부분의 부모가 그렇듯 그들은 설명할 수 없이 깊은 사랑을 전제로 자식을 길렀다. 자식을 인도하고, 가르치고, 사랑한다. 나의 부모님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없이 그렇다. 나는 그들에게 많은 것들을 받았고, 또 배웠다.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그들은 어떻게든 나의 숨을 붙들으려 갖은 노력을 했다. 여전히 미숙하고 어렸던 그들은, 자신들과 너무나 닮은, 너무나 작은 그 생명체들의 숨이 멎을까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살았을까. 하루하루 고달프고, 외롭고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이다. 그들을 통해 나는 열정을 배웠고, 성실을 배웠고 또 따뜻함을 배웠다. 투지를, 끈기를, 베풂을 배우고 친절함과 상냥함, 다정함과 냉정함, 소비와 절제를 배웠다. 내게 그들은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가르쳤다. 또, 분노를 배웠다. 슬픔을 배웠다. 우울함을 배웠다. 온실 밖의 세상은 차갑다는 것, 그 속에서 내 편이 없다는 것, 거리를 두는 것, 고립하는 것, 고립되는 것. 나는 외로움을 배웠다. 불안함을 배웠다. 두려움을 배웠다. 엄마가 한숨을 쉬는 이유도, 아빠가 술을 마시면 나지막이 욕을 하는 이유도 나 때문이라는 사실도 배웠다. 고마움을 배웠다. 그 고마움은 미안함에서 나온다는 것도 배웠다.
미안함. 그들의 세상에 그늘이 진 이유가 나라는 나무를 키웠기 때문이라는 미안함. 고왔던 얼굴에 유난히 세월이 빨리 자리를 잡는 이유가 나라는 미안함. 손이 상하고 무릎이 상해도 매일같이 회사 나가야 하는 미안함. 표현할 수 없는 미안함을 배웠다.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미안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변색했다. 검게 변색한 감정은 숙성된 바나나처럼 달지 않았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리면, 이상하게 찡- 했던 코끝의 감각이 무뎌지고 알 수 없는 분노가 느껴진다. 기원을 알 수 없게 된 감정은 칼날이 된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가 서로의 미안함을 무기로 삼아 가장 뾰족한 칼날을 휘두르며 의미 없는 전쟁 속에 스스로를 던져놓는다.
애증. 나는 애증을 배웠다. 서로를 사랑해서 증오하고, 서로를 증오해서 사랑하는 듯하다. 자기 자신을 똑벤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 모습을 증오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곧 서로를 얽어매는 올가미가 되어 서로의 숨통을 조인다.
애증.
이보다 비겁한 단어가 있을까. 이보다 슬픈 단어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