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침이 천천히 움직이는 시계에 배터리를 갈아 끼웠는데, 하루가 지나지 않아 다시 천천히 움직인다면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뭐야? 이 배터리 새거 맞아? 다 쓴 배터리를 내가 잘못 넣었나?’
왜 이렇게 힘이 든 걸까? 몸이 금방 지쳤다. 나의 배터리는 고장이 난 듯하다. 먹는 걸로 충전하는 나도 지쳤다. 얼마 전부터 혀에 백태가 끼어서 아무리 칫솔질을 열심히 해도 닦이지 않았다. 항상 손 발은 차가웠으며 발이 시려서 눈을 뜨면 수면 양말을 신고 있었다.
몸이 이상을 감지하고 가기 싫은 병원을 또 가봐야 하나 싶을 때쯤, 수술 후 정기 검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검사가 그렇게 많은지 예약이 복잡했다. 금식을 해야 하는 검사라 아침 첫 타임을 잡았는데 그다음 검사 일정이 꼬여서 4시간을 기다렸다 검사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나는 그 오전 4시간을 왔다 갔다 하는 대신에 강남 세브란스 근처 여성전용찜질방을 선택하였다.
찜질방을 들어가서 씻고 찜질복을 갈아입고 매트를 피고 누우려고 할 때였다.
“야~ 이 씨발 X아! 내가 너 꼭 콩밥 먹게 해 줄 거야. 절~대, 너랑 합의 안 해. 너 어디 한번 봐봐. 내가 해주나? 안 해주나? 이 씨발 X아!”
라고 소리 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고음이었지만 울며 처절하고 절규하고 있었다. 깜짝 놀라다 못해 무서웠다. 소리가 나는 방 쪽을 주시하고 있는데 그 여자가 나왔다. 여자의 오른쪽 이마는 찢어져 있었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얼굴은 이마에서 흐르는 피와 눈물이 섞여 피범벅이었다. 그녀는 얼굴도 예쁘고 날씬했으며 많아야 40대 중후반의 여자였다. 그녀는 나와서도 욕을 하며 울분을 토해내며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오전시간이라 주변에 몇 사람이 없었고, 터줏대감처럼 보이는 나이 많은 아주머니와 찜질방 매표소에 있는 할머니가 오가며 깨진 유리와 떨어진 피를 닦느라 방을 들락날락할 뿐이었다. 주변을 아무리 눈 씻고 봐도 몇몇 구경꾼 외에는 상황 정리를 도와주거나 해결해 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어머.. 이를 어쩌지? 내가 신고를 해줘야 하나? 오지랖 이라고는 1도 없는 내가 뭔가를 도와야 할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이쯤 되면 ‘경찰을 부르는 게 맞지 않을까? 얼른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나라도 가서 얘기를 해줘야 하나? 피해자 입장에서는 경찰이 현장에 오는 게 좋을 텐데..‘라는 생각에 터줏대감처럼 보이는 아주머니께 여쭤봤다.
“무슨 일이에요? 저분 병원 가야 할 것 같은데..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휴~ 했어. 이제 곧 올 거야. 으이그.. 원래 둘이 언니 동생하는 친한 사이야. 술이 웬수야. 웬수!”
“네? 그런데 어떻게 피가 나요?”
“둘이 맥주 마시다가, 뭘로 말다툼하다가 컵을 던진 모양이야. 그게 튀어 맞아서 이마가 찢겼는데, 아주 손도 못 대게 해.”
“어머.. 병원에 얼른 가야 할 것 같은데..”
“아~ 글쎄, 가라고 해도 저렇게 말을 안 듣고 있어.”
그녀들도 아주머니도 여기 모든 사람들은 거의 매일 오는 찜질방 멤버 같았다. 아주머니가 쓸고 닦고를 하는 동안에도 고성의 여자의 절규는 계속되었고, 가해자로 생각되는 동생의 목소리는 뭐라고 하는지 모를 정도로 작은 소리 몇 마디뿐이었다. 지속되는 욕과 눈물 섞인 절규에도 가해자 동생은 대꾸가 없었다. 일방적인 절규가 너무 안쓰럽게 들릴 정도였다.
경찰이 도착했다. 여성전용 찜질방이라 뒷문으로 들어간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경찰의 권유에도 경찰서를 가지 않았다. 오히려 돌려보냈다.
이쯤 되니, 이곳 여성 전용 찜질방에서 쉬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일단, 매트를 펴고 누웠다. ‘콩밥 먹이려면 경찰서를 가야지, 지금 가는 게 더 나은 거 같은데.. 왜 저러고 있지? 잘 모르나? 저 여자, 지금 너무 감정적인 것 같은데..‘
경찰을 돌려보내고 어떻게 되었는지 방안에서는 대화하는 소리와 가끔씩 흥분하는 소리만 오갈 뿐이었다. “야. 언니라고 부르지도 마!”라고 하는 여자의 욕설이 들리고, 얼마 후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고성을 지르던 여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침묵하고 있던 가해자의 소리 같았다. “언니가 ~~”라는 소리와 울먹이는 소리는 섞여서 알아들을 수 없었고 꽤 긴 시간 이어졌다.
뭐지? 밖에서는 아주머니들이 한숨을 쉬며 술이 문제라는 둥 무섭다는 둥 왜 공포분위기를 만드냐는 둥 얼굴이 저렇게 돼서 어쩌냐는 둥의 얘기를 소곤 될 뿐이었다.
조용한 시간이 한참 흐른 뒤, 그녀가 나왔다. 이마에는 반창고가 붙여져 있었고 머리는 말끔히 묶었으며 입꼬리는 민망한 듯 올라가 있었다.
헉. 뭐야? 설마.. 화해한 거야?
그랬다.
그 아수라장에서 피 흘리며 절규하며 공포 분위를 만들고, 경찰차며 구급차까지 오갔던 상황은 정리되었고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이 흐르고 있었다.
‘어머~ 저 지경이 됐는데도 사과로 끝낸 거야? 참.. 내..‘ 사람들이 수군댔다.
그 순간, 내 머리에선 종이 울렸다.
’어머.. 나 같은 멍충이가 도우려고 했던 거야?‘
그녀는 잘 모르는 게 아니었다. 현명했다.
아니 어쩌면 현명해서 그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 본인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충실히 한 건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그녀가 동생에게 콩밥을 먹게 했다 한들 그녀 마음이 풀렸을까?
그녀가 동생을 경찰서에 데려갔었더라면 그 동생이 눈물 나는 사과를 했었을까?
그녀가 형벌을 주기 위해 형사 재판을 벌이는 상황에서 사과를 받았을까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그녀는 이 모든 걸 알고 그렇게 행동한 것일까?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순간이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인생에 정답이 없다는 걸 한 편의 드라마를 직접 눈으로 보고 배웠으니.
딱 봐도 선생처럼 보이는 나의 외형과 예쁘게 치장을 하고 다니는 40대 여자. 이렇게 둘 만 놓고 비교해 본다면, 내가 더 현명하게 판단하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이 생각이 들자 창피했다. 나에게.
그녀는 옳았다. 설사 치료비를 혼자 감당한다 하더라도 이번 사건의 처사는 너무 훌륭했다. 그건 피를 말끔히 닦고 깨끗이 머리를 묶고 방을 나오며 민망해하는 그녀의 눈빛과 올라간 입꼬리에서 알 수 있었다.
만약에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럼 이제, 이런 해결책도 있다는 걸 알았고 더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니 내가 바뀔까?
그건 모르겠다.
이성만이 옳은 줄 알았다.
감성은 깊숙이 넣어놔야 되는 줄만 알았다.
이성적인 사람이 항상 이긴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내게 알려줬다.
아니 보여줬다.
세상 어디에도 정답은 없음을.
다만, 다양한 답이 존재할 뿐이었다.
검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내가 싫어했던 라이프니츠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미적분을 만든 수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데카르트와 같이 합리론을 주장한 철학자이자 수학자, 과학자이다. 그가 한 말 중에 살아갈수록 더욱 내 가슴에 음각처럼 파고드는 문장이 있다. 바로 ‘충분 이유의 원리’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거대하다 못해 종교와도 맞닿아 있다. ’아무 일도 이유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사실이나 사건에는 그것이 그렇게 존재하고 발생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은 없다.
Everything happens for a reason.
맞다!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은 없.었.다.
또 생각했다.
나에게 암을 또 주신 이유가 뭘까?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