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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월드에서 눈 뜨고 쓰러질 때

by 빛날현


가끔 난,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암 수술을 두 번이나 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보낼 때는 내가 정말 ‘최강멘털’일까 아님 ‘속 없는 사람’일까 헷갈릴 때도 있다. 그러다 ‘이게 어디야? 두 번이나 암 수술을 하고도 이렇게 살아있고 또 소중한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내고..’ 이렇게 생각했다가도 가끔 늪에 빠진다. 난 재수 없는 여자 일까? 도대체 나의 업보는 얼마나 남은 걸까?


피 흘리던 그녀에게 인생을 배운 지 일주일 후, 진료 예약에 맞춰 병원에 갔다. 교수님께서 검사 결과를 보고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위 절제술 후 위에서 만들어지는 내인자가 부족해져서, 장에서 비타민 B12 흡수가 잘 되지 않아, 따로 약으로 복용해 줘야 해요. 처방해 드릴 테니 매 끼니마다 약을 잊지 말고 꼭 챙겨 드세요. “ 교수님께서는 부드럽고 차분하게 말씀하셨지만 이건 ‘말초신경장애’와 평생 함께 살라는 선고였다.


위가 없으니 음식으로 섭취해도 흡수가 거의 안 되므로 가장 크게 두 가지의 해결 방법이 있다. 비타민 B12 근육주사 투여나 비타민 B12 고용량 경구제를 먹으면 일부가 장에서 흡수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치료하지 않으면 빈혈과 신경 손상이 진행될 수 있다.


그랬다. 그간 내가 피곤하고 어지럽고 천장에 별이 보일 정도로 빈혈이 심했던 것. 운전하면서도 혼자 멀미하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했던 증상들. 손발이 차다 못해 저리고 우울하고 힘이 없었던 날들. 혀가 조이고 하얗게 백태가 생겨서 매일 양치질하며 열심히 닦아 봤던 날들. 이러한 말초신경장애 증상들을 읽으며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이 비타민 하나가 이렇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와~ 수술하면 낫는 줄 알았더니 평생 이 영양소를 흡수하지 못하니 약을 먹으라고?


항암이 없다고 끝난 것이 아니었다.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니. 이런 걸로 슬퍼하면 누군가 얘기해 줄 것이다. ‘죽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라고. 그럼 난 그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혀가 조여 오는 느낌. 매일 뭐를 먹어도 맛이 없는 이 느낌. 이걸 24시간 이라도 느껴 봤느냐고..’ 물에 빠진 사람 건져놓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심보가 내게도 이렇게 오나 보다. 그러나 이 화는 어디에도 말을 할 수 없었다. 티를 낼 수 조차 없었다. 화가 주체가 안되는데, 이 화는 분명! 나만의 몫이었다.


사람마다 각자 다른 각각의 몫이 있다. 그 몫은 종류도 다양하며 수용 가능한 범위도 다르다. 나는 나의 범위를 그려봤다. 알고 있는 것과 받아들인 것은 다르다. 19세기 실존철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는 것을 아는 것과, 내 삶에서 그것을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르다 ‘고. 그러니 난 경험자이고 달라야 하는 것이 맞다. 이미 유언을 해 보는 경험이 두번이나 있으니. 비슷한 준비의 경험을 해 본 나로서 경험하지 않은 사람처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면, 아마 신은 내게 다시 가르쳐 줄지도 모른다. 다음엔 더 아픈 방법으로. 그러니 난 받아들여야 했다. 신께 또 혼나기 전에. 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 늘어났음을.


또,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나의 주변인들이다. 우울의 바닥에 있을 때 나를 지켜준 건 내 주변이었다. 우울할 때는 그들도 안보였지만 결국 그들의 도움으로 살고 있었다. 우울은 늪과 같아서 한 번 빠지면 나오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전염성도 아주 높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내 주변에 전파하고 싶지는 않았다.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내 몸은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울이란 틀에 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틀을 씌우기에는 아직, 내가, 너무, 소중했다.

지금의 날 있게 해 준 나의 사랑하는 딸들~

그리고 가슴속으로만 사랑하는 나의 남편.

가끔 나의 존재를 확실히 드러내주는 내 원가족들.

나의 민낯을 보여줘도 지지해 주는 사랑하는 친구들.

그리고 부족한 나를 좋은 사람이라 생각해 주는 나의 지인들.

그래~ 뭐가 문제야? 약 먹고살면 되는 거지 뭐~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계절의 여왕인 5월이 오고 있었다.


40대에게 5월은 참 힘든 달이다. 가정이 있다면 어린 자녀의 어린이날과 양가 부모의 어버이날을 모두 챙겨야 하니 그 원망이 고스란히 계절을 향할 뿐이다. 어쩌면 6월 말에 오는 장마가 이 원망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위를 제거한 지 6개월이 지나고 가족들조차 나의 암수술이 잊혀질 때쯤, 반대로 나는 위(stomach)의 빈자리를 더 확실히 느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빈자리는 ‘나의 신체’만이 느끼고 있을 뿐, 어린이날은 비켜가지 못했다. 둘째 딸이 조그마한 입으로 얘기한다.

“엄마! 있잖아요~ 이건, 내가 해달라고 하는 건 아닌데.. 혹시, 아니, 만일 안되면 안 된다고 해도 돼! “

“뭔데? 엄마한테 말해봐~”

“음.. 우리도 에버랜드나 서울랜드 같은 큰 놀이동산 한 번 가보면 안 돼요? 내 친구들은 다 갔다 왔다는데 나만 안 가봐서 가보고 싶어요.”

‘아이 참~ 어린애가 왜 이렇게 말을 예쁘게 하는 거야?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거절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입술에 꿀이라도 발랐는지 달달한 아이 앞에서 바로 ‘그래~가자!’를 외쳐버렸다. 그래도.. 사람 많은 인파를 피하기 위해 휴일 일주일 전, 지하철을 탈 수 있고 실내가 있는 롯데월드를 선택하게 되었다.


예상은 빗나갔다. 공휴일이 샌드위치로 있는 주라 사람은 많았다. 지하철을 타고 오픈런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삽시간에 인파로 그 큰 롯데월드를 가득 메웠으며, 나는 아이 두 명 놀이기구를 태워주기 위해 줄 서기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놀이기구를 하나 탔을 때부터 대부분의 놀이기구는 두 시간 이상의 대기시간으로 늘어났으며, 결국 우리는 점심을 먹고 이른 퇴장을 하기로 했다. 롯데월드에서 퇴장을 하러 가는 발걸음부터 이상했다. 발에 느낌이 없었다. 100m 걷다가 쉬고 또 몇 발자국 걷다 쉬고를 반복했다. 말초신경장애 약을 먹은 지 일주일도 안 되는 시점이었다. 불안이 엄습해 왔다. ‘빨리 지하철을 타야지’라는 생각으로 퇴장하여 지하차도를 걷는데 이미 다리의 힘은 풀리고 종아리의 알이 마음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발가락이 뒤틀어지고 발레리나처럼 꺾이기도 하며 다리가 정말 자기 마음대로 움직였다.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다. 난 그대로 눈을 뜬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쓰러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깔깔깔 웃으며 쫓아오는 두 딸이 놀랄까 봐 침착하게 말했다. “엄마 다리에 쥐가 났나 봐~ 움직일 수가 없어.” 담담하게 말했지만 다리가 굳어가는 것만 같았다. 감각이 없고 다리 알이 혼자 이리저리 움직였다. 무서웠다. 나는 바닥에 앉아 신발을 벗고 깊은 심호흡을 할 뿐이었다. 나와 살면서 위기의 순간을 많이 겪어본 남편도 아무 말 없이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두 딸도 놀란 눈과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내 다리를 꼭꼭 주물렀다. 그 많은 인파 속에 주목받고 있었다. 그러나 난 고개를 숙이고 우리끼리 눈빛 교환만 할 뿐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남편이 사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비상상황실에 들어가서 구급조치를 받았다. 이어 롯데 의무실에 연결되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호들갑하지 않았다. 다만 감각이 없는 다리를 가엾어할 뿐이었다. 휠체어에 실려 롯데호텔 맨 위층에 위치한 의무실로 올라갔다. 의무실 선생님께 암 병력을 얘기하고, 말초신경장애 약을 먹고, 찜질을 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괜찮아졌다.


돌아오는 길.

진이 빠지는 경험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난 이상하고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이게 뭐지? 이 느낌은 뭘까? ‘아이들이 안 놀랐을까, 창피하지 않았을까’ 아이들을 보니 마냥 아쉬운 막내의 해맑은 얼굴이 보였다. 옆에 남편을 보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덤덤히 앉아 있는 남편이 보이고, 그 옆에 불현듯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태도!’ 아~~~ 빅터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얘기한 ‘태도’가 이거구나~! 정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태도’ 뿐이었구나. 같은 고통 속에서는 어떤 이는 무너지고, 어떤 이는 인간다움을 지키려고 애쓴다. 빅터프랭클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중요한 건 외부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내적 태도의 중요성을 말한다. 분명 알고 있었는데, 방금 안듯 전율이 흘렀다.


맞다. 정신은 태도를 지배한다. 난 쓰러지는 순간에도 창피해하지 않았다. 남편도 아이들도 그 누구도 울지 않았으며 호들갑하지 않았다. 그 순간, 오로지 그 상황에만 집중했고 나의 다리가 회복 가능할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병원에 도움이 필요할지에 대한 전념을 했다. 그 순간 내가 창피해하고 울었다면 상황은 어땠을까? 우린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신속하고 침착하게 대처할 뿐이었다. 아이들의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길거리에 쓰러진 엄마를 창피해하지 않고 엄마 발을 열심히 주무르는 아이들을 보며 마음은 전달되는 것임을 느꼈다. 그리고 가족 모두 투정 없이,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생각해 보았다. 내가 소리를 질렀다 한들, 울거나 통곡했다 한들, 아이들이 울었다 한들, 남편이 호들갑했다 한들.. 뭐가 달라졌을까? 더 위급한 상황으로 보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도왔을까? 가보지 않은 길이라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내가 한 행동에, 이미 내가 다른 관점을 갖고 있음을 느낀다. 아픈 하루였음에도 뭔지 모를 이 뿌듯함은 극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중심을 잡으려는 나의 태도, 그리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직 나에게 집중해 줬던 우리 가족의 태도에서 오는 게 아닐까.


기도해 본다. ‘내가 만드는 의미 있는 나의 내부가 외부로 뿜어져 나오길, 나의 외부로 젖어들기를~’

비록 가진 것은 초라할지라도 내면의 빛이 배어 나와 ‘나의 삶의 태도’가 만들어지기를, 그런 삶을 살기를 욕심 내어 본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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