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주변 사람들이 칭찬한다. 아니 말한다. ‘정말 대단해~ 정신력 짱이야!’ 그러나 이것이 칭찬이라 할지라도, 어느 한 단면만 본 건 아닐까? 나의 정신이 승리하는 날은 그닥 많지 않다.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건 신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체력이다. 체력이 떨어지면 반드시 정신이 신체 밑으로 기어 들어간다. 그럼 이런 생각이 든다. ‘이제 난 일상생활을 할 수 없으려나?’ 불안이 오고 있었다.
불안 없이 사는 사람이 있을까?
뉴스 예보를 듣고 우산을 챙겨나간 날, ‘어머! 내가 우산을 챙겼나’를 확인하고는 안심한다. 그러나 불과 몇 초 후, 이런 생각이 온다.
‘이 바지, 비 맞으면 안 되는데..’
알랭드보통의 저서 [불안]에서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어른들이 그리 말씀하셨나 보다. ‘인생 다 거기서 거기야~!’
불안이 해결할 수 있는 거라면, 인간은 현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이면 가지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기에 불안은 우리에게 유해하다고 할 수 없다. 다만, 항상 함께 하는 것이며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대한 것만이 불안의 정도와 질을 가감해 줄 것이다. 우리가 불안을 인지하는 것만으로 우린 약간의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아~ 내가 지금 불안하구나. 불안해하고 있는 중이구나.’
이렇게 내가 날 알아주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자, 마지막 단계인 것이다. 우리에게 더 좋은 해결방법은 복잡하기만 할 뿐, ‘나에 대한 인정’ 그 이상이 없지 않을까?
불안 속에서 많은 방황을 하며 내 자아를 괴롭히다가 또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고백하건대,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부자도 아니고 존경을 받는 사람도 아니고 높은 지위나 권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예쁜 사람도 아니다.
내가 가장 부러운 사람은 바로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사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사람’이다. 난 이런 사람이 너무 부럽다. 지금까지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사는 것이 쉬울까? 상사에게 혹은 배우자에게 남편에게 혹은 부모에게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가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아마도.. 하고 싶은 말을 이성이라는 망에 거르기 때문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아이를 혼내다가도 화가 나면 화를 다스리고 말해야 하는 엄마이다.
남편이 맘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여도 그도 힘들 것을 고려해서 말해야 하는 아내이다.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엄마의 상황까지 생각해서 효도해야 하는 딸이기도 하다.
또 주변에 힘든 얘기를 들으면 같이 마음 써줘야 직성이 풀리고 그냥 못 넘어가는 곧이곧대로의 성격도 가졌다.
바꿔 말하면 속이 힘든 스타일 되시겠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이라는 틀을 가지고 있기에 마음대로 말하지 않는다. 때로는 남을 먼저 배려하느라 정작 스스로에게 가혹할 때가 있다. 나를 먼저 배려하는 것이 이기적이라 생각할 때도 있을 것이다.
초식동물에게 고기를 권할 수 없듯, 타고난 성향이 내향적인 사람에게 마음에 있는 말들을 거침없이 꺼내기란 매우 힘들다. 그러나 우린 동물보다 진화한 두뇌가 있고 ‘생각의 틀’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이름하여 패러다임이라고 한다. 그럼 이 패러다임을 한번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체력 싸움 중인 시절, 친정 엄마가 우리 집에 놀러 오셨다. 엄마는 사실 오랜만에 오셨다고 하셨지만 오랜만이라고 할 수도 없다. 불과 두 달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딸이 아픈 건 새까맣게 잊으셨는지 또 내게 신세한탄을 하신다. 레퍼토리는 이러하다. 자식이 셋이나 있어도 누구 하나 전화하는 사람도 없고, 아빠도 말 한마디 안 하고, 밥도 따로 먹고, 사는 게 사는 거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아~ 또 시작되었구나. 요즘 한동안 뜸하셨지..’ 싶었다. 엄마는 삼 형제를 키우시느라 고생하셨지만, 사회생활을 많이 안 해보셔서 아직도 소녀 감성이 있으시다.
또 요즘 엄마 아빠 두 분이 부쩍, 자주 다투신다. 노화로 인해, 정신적으로는 점점 애가 되어가시는 두 분의 각자 얘기를 들어보면 몇 십 년째 듣는 똑같은 얘기의 되풀이일 뿐이다. 요즘 어째 좀 잠잠하다 싶었더니 엄마가 또 시작하셨다. 아빠 흉으로 시작하는 엄마의 레퍼토리를.. “너네 아빠가 요즘 이상해. 말도 안 하고 아주~ ” 순간, 나도 모르게 엄마의 말을 잘랐다.
“엄마! 그런 얘기하지 마세요. 그런 얘기 듣고 싶지 않아. 그런 얘기는 좀 엄마 혼자 삭혔으면 좋겠어. “
단호한 나의 말에 엄마 눈이 동그래졌다. 결혼 전 엄마와 싸우던 여러 장면들이 나의 머릿속에서도, 엄마의 머릿속에서도 파노라마 되어 흐르는 듯했다. 서운하고 짧은 대화가 핑퐁처럼 오고 가고, 엄마가 놀라고 서운한 표정으로 답한다.
“그래~ 너는 너만 알고, 니 세끼만 알고, 엄마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다 이거지? 알았어. 넌 내가 죽어도..”
여기까지만 듣고 또 바로 잘라야만 했다. 이번엔 더 단호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엄마의 눈물이 또 터졌다. 그간의 세월, 힘든 세월 보내며 쌓아놨었던 둑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걸 내가 받아서 좋은 것이 아니다. 엄마가 잘 흘려보낼 수 있게 난 그저 옆에 있어 줄 수 있는 것. 그것이 전부이다. 그것만이 나의 몫인 것이다.
“엄마~ 제발 신파극 좀 그만해요. 아니, 내가 먼저 죽을지, 엄마가 먼저 가실지, 누가 어떻게 알아? 엄마! 다 각자가 제각기 다른, 각자의 삶에 몫이 있는 거예요. 엄마랑 나랑 가끔 보는데 자꾸 이렇게 얼굴 붉히는 얘기만 하고 부정적인 얘기만 하면, 뭐가 좋겠어요? 엄마! 내가 엄마 만나면 맨날 아프다, 소화 안된다, 어디 불편하다, 그래요? 안 그러잖아요. 밥 먹을 때마다 뭐는 되고 뭐는 안되고, 소화를 하네 못하네, 이런 얘기 안 하잖아요. 내가 내 마음 있는 데로 다 얘기하면, 아무도 나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나도 힘들 때마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징징거리고 싶어~ 그렇다고 만일 내가, 엄마한테 전화해서 매일 징징대면, 엄마 내 전화받고 싶겠어요? 엄마, 제발.. 각자의 삶이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모두 다 감당해야 하는 몫이 다른 거라고요. “
말을 한 건지, 강의를 한 건지, 소리를 지른 건지, 모르겠다. 순간 나도 모르게 따발총처럼 쏘아댔다. 아니 어쩌면 ‘엄마보다 내가 더 힘들다고, 지금 너무 힘들다고, 내가 내 몸 하나도 감당이 안 된다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정적이 흘렀다. 엄마가 조용했다. “그래~ 네가 아직 많이 힘들지? 그래.. 지금은, 너 건강만 챙겨~ 엄마가 몰랐다. “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내가 너무 쏘아 댔나?’ 잠깐 멈칫하는데 엄마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엄마가 딸의 투정을 눈치 채신 것일까?
‘엄마, 엄마 마음을 함께 하지 못해 죄송해요.’
차마.. 이 말은 하지 못했다.
부모를 측은해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부모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사람은 나눌 수 없는 존재이다. 어차피 삶은 혼자인 것이다. 그저 순간을 함께 할 뿐이다. 모두 각자의 삶에 몫이 다른 것이다.
이 ‘몫’을 과제 분리로 설명한 베스트셀러가 있다. 개인심리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아들러의 사상을 잘 풀어놓은 [미움받을 용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과제 분리란 ‘이건 내 몫, 저건 네 몫’을 명확히 해서 불필요한 간섭과 기대를 내려놓아야 비로소 미움받을 용기도 생기게 된다고.
다시 말해, 저자는 인생의 문제는 ‘누구의 과제인가’를 따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과제, 상대가 판단하고 선택하는 건 상대 과제인 것이다. 그러니 타인의 과제를 대신 짊어지려 하지 말고, 내 과제에도 간섭받지 말아야 하며 또 모든 상황, 모든 이들에게 잘 보일 수는 없는 것이라는 해방감을 준다.
생각해 보라~ 나에게 적이 없다는 것은 큰 사랑을 못 받은 것일 수도 있다. ‘적을 만들지 마라’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미지근하게 살라는 말처럼 들린다.
때로는 뜨겁게, 때로는 차갑게 살아보는, 그런 인생을 재밌게 살고 싶다~
그래서 난 이번 나의 ‘버럭’을 칭찬한다. 때로는 나를 지키는, 내 마음을 말하는, ‘버럭’이 필요하지 않을까?
가끔은, 때로는 이기적이어도 괜. 찮. 다. 는 생각이 든다. 왜? 내 인생이니까.
아무도 모른다. 내 인생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정답을 모른다. 영원히. 그 누구도.
왜냐면, 정답은 원래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P.S.
개인사정으로 추석까지 연재를 잠시 쉬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