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저마다 바쁘게 또 열심히 살아간다. 로마 역시 그랬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의미를 담아 관광을 하고, 그들을 맞는 로마인들 역시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사랑을 약속하는 듯한 연인들, 아직 히잡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 벗은 듯 안 벗은 듯 육중한 몸의 개성을 드러내는 사람들, 딱 보아도 고위 관리직에 어울릴듯한 미국인들, 명품으로 휘감은 사람들, 거리의 때를 한껏 안은듯한 사람들, 모두 다양한 피부색으로 다양한 관광을, 다양한 삶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무슨 배짱이었을까? 이탈리아 여행을 어린 두 딸을 데리고 그것도 자유여행을, 남편 없이 혼자 가기로 결심한 나에 대한 의문이 비로소 풀렸다. 나의 MBTI는 ISFP이다. 그러나 일(work)적으로는 ENTJ가 나온다. 22년째 매 학기를 계획해서 강의하는 나는 일할 때만큼은 철저한 J가 된다. 태생적으로 P(인지형)인 내가 일할 때만큼은 참 애쓴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장기 여행까지 바로 전날에야 짐을 싸는 나는 정확한 P형이다. 그래서 이번 여행을 결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을 로마 공항에 도착해서 첫째 딸의 상기된 얼굴을 보고서야 정확히 인지할 수 있었다. 소매치기의 위험에 잔뜩 긴장한 딸을 보고 단박에 결정했다. ‘이곳에서 대중교통은 못 타겠구나.’ 그때부터 여행의 목적은 ‘건강과 안녕’ 단 둘이었다.
로마의 여행은 명성만큼 흥미로웠다. 로마 문화유적지의 웅장함은 누구나 느낄만한 ‘소오름’이었으며 로마인의 자부심을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우리나라도 역사의 보존을, 아니다. 나의 역사의 보존을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지난날의 부족했던 나, 부끄러웠던 나, 대견했던 나, 꿋꿋했던 나, 이 모든 시간이 쌓여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 나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시작이리라.
이러한 로마를 둘러보기 위한 교통수단은 오직 택시뿐이었다. 어차피 위(stomach)가 없어 멀미로 인해 버스를 타는 패키지투어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린 자녀 그리고 오래 못 걷는 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콜로세움에서 이동할 때 오고야 말았다. 다리부터 발가락이 꼬이는 신호가 오고 있었다. 분명 약을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래 걸은 것이 문제였다. 발바닥 아치에서 오는 신호는 눈앞의 많은 인파와 겹쳐지며 공포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 오싹해졌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가는 나라 망신일지도 몰랐다. 난 재빨리 화단에 올라앉아 다리를 펴고 신발을 벗었다. 혼자 놀라 등줄기 땀이 흘렀지만 그 누구도 몰랐으며, 사실 관심조차 없었다. 이번에도 아이들이 주무르기 시작했고 복귀를 위해 잠시 쉬고 있었다.
한 이십여분 지났을까? 조국의 계단에서 뛰어놀던 둘째 딸이 화장실이 급하다는 것이었다. 난 딸들에게 엄마가 움직일 수 없으니 길 건너 상가에서 화장실을 물어보라고 했다. 잠시 후, 초초함에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받지도, 돌아오지도 않았다. 순간, 앞이 캄캄했다. 운동화를 들었던 것만 기억날 뿐, 난 맨발로 뛰고 있었다. 맞은편 거리를 보기 위해 위아래로 뛰는데 아이들이 보이질 않았다. 양손에 신발을 든 채 신호등을 건너고 맞은편 상가로 가며.. 다행히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찰나의 몇 분이 지나고, 화장실을 들러 나와 우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로마의 거리를 걸으며 아스팔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쉬기도 하고, 또다시 맨발로 걷기를 반복했다. 지친 둘째 역시 나를 따라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를 즐기고 있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적당히 우리에게 맞게, 여행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눈만 돌리면 펼쳐지는 그림 같은 풍경들이 힐링이었다면, 눈만 돌리면 보이는 아이들은 한없는 부담이기도 했다. 내가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 이건 나의 의무이자 숙제이며, 타국에서 느끼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아이를 성인으로 키운다는 것, 그간 보살펴야 한다는 것. 이 양육에 대해 또 생각해 보았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속담이 있듯 ‘아이를 잘 키우는 것’,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 이상의 일은 없는 것같다.
우리는 고대부터 현대가 공존하는 로마에서 사흘을 보내고 베니스로 이동했다. 도착하니, 눈앞은 마치 외국 동화책을 편 듯했다. 물의 도시 베니스는 신기했다. 흐르는 것이 세월인데, 베니스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있었다. 섬답게 모든 것이 멈춘 듯했고 우리도 천천히 그곳의 숨을 담았다. 마치 우리가 화려했던 근세 시대 안에 존재하는 듯 잠시 여유를 즐겼다. 그렇게 베니스에서 이틀을 보내고 또 피렌체로 이동하였다. 20대의 나를 설레게 했던 두오모. 드디어 도착을 했다. 일단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그렇게나 가고 싶었던 두오모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웠다. 석양이 비치는 두오모는 더없이 예뻤다. ‘저기가 두오모인가? [냉정과 열정사이]를 읽으며 내 머릿속에 그렸던 두오모가 바로 저기인가?’ 실제로 보는 두오모는 내 상상보다 아름다웠다.
그러나 난 두오모에 오르지 못했다. 두오모 근처에 다달았을 때 알았다. 이건 이미 나의 몫이 아니었다. 나의 체력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고 나의 설렘도 20대가 아니었다. 흘러간 것이었다. 이렇듯 흐르는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듯 뭐든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해주듯, 나의 체력도 나의 상황도 예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꼭 오르고 싶다는 첫째 딸을 설득하는 데에도 어렵지 않았다. 근처를 지날 때쯤 또다시 다리에 쥐가 나서 어느 상가 앞에서 주저앉아 신발을 벗고 다리를 주무르고 있을 때였다. 많은 인파 속에 티도 안 날 법한데 이번에는 지나가던 영국인 커플이 괜찮냐며 119를 불러준다고도 하였고, 옆 상가 직원이 나와 나를 부축해서 옆의 약국에 데려다주었다. 약국에 들어서서 나는 혹여 모를 상황에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위암 환자라는 것도 말초신경장애라는 것도 밝혀 놓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이 때문에 놀란 건 첫째 딸이었다. 유난히 해맑은 영혼을 가진 첫째 딸이 놀랐다. 단어의 의미를 되묻는 첫째 딸에게 난 아무렇지 않게 얘기해 주었다. 단어의 뜻과 발병이유, 경과 후 까지도. 다행히 다리 경련이 진정되고 약사의 도움으로 바로 앞에서 콜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호텔에 누워서 쉬는데 생각이 흘렀다. 걸을 수 있을 때 하는 여행, 젊어서 하는 여행의 의미를. 그리고 지금 옆에 없는 남편이 떠올랐다. 애 둘을 데리고 어떻게 하려고 하냐며, 차라리 혼자 가라고, 유독 걱정이 많았던 남편. 여행 떠나기 전 남편의 걱정은 나를 김새게 하기에 충분했다. 난 남편이 항상 걱정이 많은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디를 여행하던 즐거움보다 걱정을 가득 안고 사는 사람 같았다. 반면 나는 항상 긍정적이고 편하게, 되는대로 즐기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남편이 옆에서 모든 걱정을 혼자 해 줬기에, 옆에 있던 나는 걱정 하나 없이 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피렌체 호텔에 혼자 누워서 깨달았다. 참.. 깨달음은 이렇게 오는가 보다.
르네상스의 발상지 다운 피렌체를 사흘간 천천히 즐기고 우린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에서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을 즐기기 위해 난 아피아가도와 카타콤을 전기 자전거 투어로 즐기기로 했다. 이 투어는 전기 자전거로 외곽 유적지를 돌아보는 투어로 인솔자가 있어 안전하고 편안했던 여행이었다. 눈앞에서 바로 펼쳐지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으며 자전거를 타며 얼굴에 부딪치는 로마의 공기는 힐링 그 자체였다.
중간중간 쉬며 걸으며 유적지를 둘러보기도 했다. 쉴 때는 광활한 자연 안의 벤치에 앉았다. 앉아서, 난 숨을 쉬고 있었다. 그 몇 초, 몇 분간, 진정한 평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순간이 나에게는 여행 최고의 순간이었다. 좋은 호텔, 편안함, 비싼 스테이크, 유명한 커피, 모두 좋았지만 최고는 아니었다. 순간, 이보다 더 평온할 수는 없었다.
아피아 가도를 달리는 끝 무렵, 바람을 가로지르며 어디선가 풍기는 향긋한 고향의 냄새도 났다. 한국의 시골에서나 맡을 법한 냄새. 그 냄새를 맡는데 기억이 각인되었다. 역시, 최고의 여행은 자연이라는 것을. 자연을 내 눈으로 보고, 걷고, 느끼고, 냄새 맡고, 흙을 만지고. 이 이상은 없으리라는 것을 난 로마의 자연에서 느낀 것이다. 인간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자연뿐이라는 것을.
이렇게 우리는 열흘간의 여행을 달콤한 젤라토로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40대 끝자락에서 나의 위를 떠나보내고
두 번의 암을 기념하는 여행.
말이 거창했지,
건강의 중요성을 깨닫는 여행이었다.
두 발로 다닐 수 있을 때,
건강할 때,
다니는 것이 여행이었다.
이제 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건강하고 싶어 졌다. 몸도 마음도. 가장 소중한 건 ‘나의 건강’이라는 이 흔한 진리를 우리는 항상 겪어봐야 아는 것이다.
얼마전, 가수 박진영이 노화를 늦추는 방법을 얘기한 적이 있다. 이 방법은 내가 좋아하는 명의의 말과도 일치한다. 주변에서 박진영에게 묻는다. “형, 검은콩 먹었죠?‘ 박진영이 대답한다. ”아니, 뭘 찾아먹지 말고, 그냥 건강에 안 좋은 음식을 안 먹으면 돼! “
세상은 의외로 단순하다. 좋다는 것을 찾아 먹기보다는 안 좋은 것을 안 먹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는 사실. 이건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건강은 삶과 직결되나 보다. 건강이든 삶이든, 보탬보다 절제가 먼저인 것이 일맥상통하는 걸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