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탈근대 시선
20대에 <상실의 시대>로 도전한 책은 주인공의 매력에 빠지지 못하여 매듭 짓지 못했다. 그러다 50을 앞두고 유행처럼 번지는 하루키를 풀기 위해 <노르웨이의 숲>으로 다시 꺼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덮고도 인간의 죽음이나 상실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 나는 관점을 찾기 시작했다. 찾았다. 아직 성숙하고 있는 청년의 상실 과정을 지켜보는 안타까운 시선을.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시대적 시선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소설은 청춘의 사랑과 상실을 다루고 있지만, 그 고통이 어떤 의미 있는 결론이나 성숙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기즈키의 자살과 나오코의 죽음은 주인공 와타나베에게 삶의 해답이나 교훈을 남기지 않는다. 더구나 필자는 현재 부모가 된 관점에서 스무 살의 자살은 공감과 이해보다는 부족함을 관망하는 안타까움이었다. 작가는 무엇을 얘기해고 싶었을까? 이는 고통을 통해 인간이 성장하고 완성된 주체로 나아간다는 근대적 소설의 구조를 거부하는 방식이며, 바로 이 점에서 <노르웨이의 숲>은 탈근대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탈근대는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 다음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도에 가깝다. 탈근대란 근대가 믿어 온 가치들, 즉 이성의 우위, 인간의 진보, 보편적 진리와 같은 개념을 의심하고 해체하려는 사고방식이다. 근대적 사고에서는 인간이 고통과 시련을 겪으며 점점 성숙한 존재로 완성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탈근대적 사고는 이러한 성장 서사와 보편적 인간상을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의미는 하나로 수렴되지 않으며, 인간은 끝내 완성되지 않은 채 살아간다는 인식이 탈근대의 핵심이다.
특히 이 소설은 ‘정상적인 삶’이라는 개념을 끊임없이 흔든다. 나오코는 정신 요양원에 들어가며 사회적으로 ‘비정상’의 위치에 놓인다. 그러나 소설은 그녀를 병든 존재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고통은 사회가 요구하는 속도와 규범에 적응하지 못한 결과처럼 보인다. 또한 병원 안의 인물들은 서로 돕는 존재들로 환자와 비환자 간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이는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믿음을 흔든다.
폴미셸 푸코(프랑스어: Paul-Michel Foucault, 1926년 10월 15일 ~ 1984년 6월 25일)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이다. 저명한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로 불리며 20세기 구조주의 기반 인문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학자이다.
이 지점에서 푸코의 탈근대적 시선이 중요해진다. 푸코는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광기 같은 구분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과 담론에 의해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보았다. <노르웨이의 숲> 속 정신 요양원은 단순한 치료의 공간이 아니라, 사회가 감당하지 못하는 개인을 분리하고 규정하는 장소로 읽힌다. 나오코는 치료받는 주체이기 이전에, 사회가 규정한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로서 배제된 것이다.
주인공 와타나베 또한 근대적 의미에서의 ‘성숙한 주체’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는 선택하고 관계를 맺지만, 그 선택에 확신이나 목적의식이 없다. 이는 푸코가 말한 주체의 개념과 통한다. 푸코에게 인간은 고정된 본질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제도와 관계, 경험 속에서 끊임없이 형성되는 존재이다. 와타나베는 끝내 자신이 누구인지 규정하지 못한 채 삶을 계속 살아간다.
결국 <노르웨이의 숲>은 삶의 의미를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의미가 확정되지 않는 세계 속에서도 인간은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담담히 보여준다. 작가는 인간이 겪는 고통과 상실을 어떤 완성이나 해답으로 수렴시키지 않으며, 그것을 극복의 서사로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정상성·성숙·주체와 같은 푸코가 비판한 근대적 개념들을 자연스럽게 해체한다. 그 과정에서 작품은 완결된 인간상이 아니라, 불완전함 속에서 흔들리며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 본다. 푸코의 가장 무서운 통찰을. 푸코는 ‘우리는 강요당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통제한다’고 말했다. 권력은 사람을 직접 억압하기보다 스스로를 관리하게 만든다. 오늘날의 사회를 보면 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자기 계발의 강박,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압박, 쉬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여전히 현대 사회의 테두리 안에 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푸코의 철학은 우리의 삶을 해석하는 데 아직 유효하다. 이를 떠올리게 하듯,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성실함과 노력만으로는 삶의 의미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허무를 보여준다.
그리고 작가는 정치, 혁명, 사회적 진보와 같은 거대 담론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1960년대라는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개인의 상실과 감정에만 집중한다. 바로 여기에 작가의 시선이 있었다. 흐름에 민감한 젊은 인물들을 통해 당시 사회를 읽을 수 있게 하는 작가의 힘이 있었다.
1960년대 일본 사회는 고도경제성장과 경제 구조가 확립된 성공한 근대로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압박 속에서 전체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암묵적으로 당연시 여겨지며 노력만이 살 길이라고 근대화를 부르짖던 시절이었다. 그 시대 속에서 그냥 흐르는 대로 살아가는, 이제야 전체에서 개인으로 옮겨가는 시대를 말하고자 한 건 아닐까? 이 책 어디에도 역사적 배경은 없다. 단지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개개인들의 흐름이 있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아직도 근대와 탈근대를 논하는 것에 반감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암묵적으로 작동하는 근대적 사고방식을 발견하곤 한다. 그것은 우리의 탓이 아니다. 근대적 성공을 거두어본 자긍심이며 자부심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각해야 한다. 모든 이면에 한계가 있듯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우리의 사고가 한 층 더 다양해질 필요와 당위를.
이 소설은 ‘성장하면 해결된다’ 혹은 ‘고통엔 의미가 있다’라는 근대적 믿음을 거부하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답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상실을 통한 교훈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탈근대적 작가의 시선인 것이다.
열심히 달리다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생각. 이 생각이 쉬울까? 사고의 틀을, 시선의 각도를 조금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두가 답을 유추하는 구조를 만들 때 하루키의 선택은 달랐다. 모두가 네라고 할 때 혼자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용기. 그 용기가 본능적 직감이었다 할지라도 박수치고 싶다.
이제야 마치며 무라카미 하루키가 왜 스테디셀러 작가인지 알 수 있었다. 이 소설이 30여 년 전에도 현재에도 베스트셀러인 이유는, 시대의 흐름을 풀어낼 수 있는 작가의 시선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