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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날현 May 20. 2024

삼청동 술집에서 현대고 vs 휘문고 교가를~!


나의 20대 시절..

E대 다니던 친구의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 친구의 남자친구들과 삼청동에서 어울려 논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친구가 말하길 삼청동 가면 현대고, 휘문고 교가를 하도 들어서 외울 것 같다고 했다.

그때 난 ‘나는 교가 기억도 안 나는데.. 왜 교가를 부르지?’라는

아주 무지한 생각을 했었다.


2000년쯤? 그 당시는 sns 같은 것도 온라인도 일반화된 시기가 아니라

아는 사람들만 갈 수 있는.. 그런 시기였다.

압구정 로데오, 학동사거리,

청담사거리의 골목골목들

모두 아는 사람들,

주변 사람들만 가는 그런 곳이었다.

(당시 청담동에 ‘고센’이라는 카페는 일반인보다 연예인이 더 많았으며 떡볶이를 16,000원에 팔았었다. 김밥이 천 원이던 시절에..)


내 나이 스물셋. 친구와 함께 간 삼청동 모임.

술 마시고 분위기가 무르익던 한창~

우리는 학창 시절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고등학교 친구들이니

뭐 몇 년 전 얘기쯤이야 웃으며 했고

중학교를 거쳐

드디어 초등학교 이야기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누구는 코를 항상 파고 다녔다는 둥,

또 누구는 맨날 누구를 따라다녔다는 둥..

그때 나는

‘우리 어릴 때 초등학교 때 금요일마다 문방구에서

100원짜리 걸레랑 왁스 사서 교실 바닥 청소했던 거 기억나?

난 대청소날이 디~게 싫었어. ’라고 말했다.

그런데..

헉! 순간의 멈춤과 그 알 수 없는 눈빛들.

아니 갑자기 당황한 눈빛들.

그 눈빛이 아직도 기억난다.

‘왜 교실 청소를 해?’라고..

누군가 한 명이 물었지만 여러 명이

눈으로 묻고 있었다.


너무 당황했던 나는 더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금요일마다 책상 밀고 마룻바닥 닦았잖아~!

그때 그들의 표정과 잠깐의 정막.


그렇다.

난 학군지에서 자라지 못했다.

그건 문제도 아니었다.

난 사립초등학교가 있다라는 걸..

대학생이 돼서야

아니 삼청동 어느 술집에서

사립초 나온 이들로부터 직접 들음으로서

알게 된 것이다.

외눈박이세상에 가면

두 눈을 가진 자가 병신이라는 말을

체감하면서 말이다.


그들은 한 번도 교실 청소를 해 본 적 없는

한 번도 난로를 피워 본 적이 없는

사립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들이었다.


누군가 한 명이 나서서 말해주었다.

원래 국립초는 난로 피우고 바닥 청소를

학생들이 직접 한다고 들었다고..

다들 아~~~ 하는 반응.

기분 나쁜.. 반응.

분명 조롱하는 것도

부정적 시선으로 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의 무색함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공중에 떠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속에 무언가가 끓어 오름을 느꼈다.

물론 내 외관상 모습 덕에 하나도 굴하지 않고 당당해 보였지만..

(아파도 아파 보이지 않고, 미안해해도 미안한 기색이 안 보이는 그런 얼굴인지라..)


그 대여섯 명 중에 어떻게 그 자리에 나만 국립초를 나온 것일까?


그날 알았다.

8학군이 있다라는 것도..

나라에서 지원해 주는 초등학교를

굳이 비싼 돈 내고 가는

사립초등학교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사립초등학교에 다녔다는 사실도..


그 자리에서 난 충격을 받았지만

굳이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절! 대! 티 내고 싶지 않아서

더 당당하게 굴었다.

별거 아닌 거에 시비를 걸기도 하고

술 안 따라준다는 이유로 집에 간다고도 했었으며

내가 잘 아는 부분으로 화재를 돌려 얘기하며

면박을 주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나를 받아 주었다.

있는 그대로~


신기한 건 내가 당당하게 대할수록

그들은 나에게 더 호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때 알았다.

내가 나한테 지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럼 남들도 나를 업신여긴다는 것을


‘뭐야? 우리 엄마는 왜 날 사립초를 안 보낸 거야?

아냐~ 울 엄마도 사립초가 있었는지도 모르셨을 거야~ㅠ

아이참! 나 같은 사람을 사립초에 보냈어야지.. ㅠ

아마 내가 사립초 나왔으면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텐데..

다들 울 엄마한테 고마워해!

내가 사립초 안 나와서 이 자리에 있는 거니까!’


그때 내가 했었던 말들이다.

그들은 내가 하는 말에 웃으며 동의해 주며

좋은 분위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젊은 남녀들 간에

썸이라는 게 떠다니는 분위기여서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사건은 말 그대로 culture shock였다.

지나면 지날수록 생각나는 일이었다.

‘왜 내 잘못도 아닌데 내가 작아지는 거야?’

끝도 없는 화가 났다.

급기야.. 나도 모르게..

엄마에게 평생 지우지 못할 상처를 주었다.

말이 칼이 되어..

엄마는 잘 살지도 못하면서 왜 애를 셋이나 낳았냐고..

애들 유학도 못 보낼 거면서 애는 왜 낳았냐고..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을..


그때 당시 나는 혼자 오롯이 이 일을 감당하는 게 불가능했었던 것이었을까..

너무나 잘나고 싶은 20대에

빛나지 못하는 나를

나 스스로 어찌할 바를 몰랐던 때에..


그리고 이에 대한 사과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친정 아빠 칠순 잔칫날,

부모님께 쓴 편지에서

이 사건을 읽으며.. 펑~펑~ 울으며..

죄송한 마음을 전달했다.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사람이 된 것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 봐야 아는

그런 인간이었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다.


그간.. 나는 아팠던 것일까?

그간.. 나의 자격지심은

창피한 줄도 모르고

어디에서 어떤 얼굴을 들고

얼마나 나다녔던 것일까?

기억할 수도 없고

내가 인지 못했을 수도 있는

그 나약하고 상처 났던 영혼이

이제 딱지가 앉아 새살이 돋아나

지금의 내가 되었다.


이제는

그 옛날 못났던 나까지 안아주는

그런 ‘나’이고 싶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겠지만..

내 상처를 꺼내

나 스스로를 보듬어 주고 싶다.

이젠 이런 마음에 당당할 수 있노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차고 넘치는 내가 되었다고!




사진출처: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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