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대 시절..
E대 다니던 친구의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 친구의 남자친구들과 삼청동에서 어울려 논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친구가 말하길 삼청동 가면 현대고, 휘문고 교가를 하도 들어서 외울 것 같다고 했다.
그때 난 ‘나는 교가 기억도 안 나는데.. 왜 교가를 부르지?’라는
아주 무지한 생각을 했었다.
2000년쯤? 그 당시는 sns 같은 것도 온라인도 일반화된 시기가 아니라
아는 사람들만 갈 수 있는.. 그런 시기였다.
압구정 로데오, 학동사거리,
청담사거리의 골목골목들
모두 아는 사람들,
주변 사람들만 가는 그런 곳이었다.
(당시 청담동에 ‘고센’이라는 카페는 일반인보다 연예인이 더 많았으며 떡볶이를 16,000원에 팔았었다. 김밥이 천 원이던 시절에..)
내 나이 스물셋. 친구와 함께 간 삼청동 모임.
술 마시고 분위기가 무르익던 한창~
우리는 학창 시절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고등학교 친구들이니
뭐 몇 년 전 얘기쯤이야 웃으며 했고
중학교를 거쳐
드디어 초등학교 이야기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누구는 코를 항상 파고 다녔다는 둥,
또 누구는 맨날 누구를 따라다녔다는 둥..
그때 나는
‘우리 어릴 때 초등학교 때 금요일마다 문방구에서
100원짜리 걸레랑 왁스 사서 교실 바닥 청소했던 거 기억나?
난 대청소날이 디~게 싫었어. ’라고 말했다.
그런데..
헉! 순간의 멈춤과 그 알 수 없는 눈빛들.
아니 갑자기 당황한 눈빛들.
그 눈빛이 아직도 기억난다.
‘왜 교실 청소를 해?’라고..
누군가 한 명이 물었지만 여러 명이
눈으로 묻고 있었다.
너무 당황했던 나는 더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금요일마다 책상 밀고 마룻바닥 닦았잖아~!
그때 그들의 표정과 잠깐의 정막.
그렇다.
난 학군지에서 자라지 못했다.
그건 문제도 아니었다.
난 사립초등학교가 있다라는 걸..
대학생이 돼서야
아니 삼청동 어느 술집에서
사립초 나온 이들로부터 직접 들음으로서
알게 된 것이다.
외눈박이세상에 가면
두 눈을 가진 자가 병신이라는 말을
체감하면서 말이다.
그들은 한 번도 교실 청소를 해 본 적 없는
한 번도 난로를 피워 본 적이 없는
사립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들이었다.
누군가 한 명이 나서서 말해주었다.
원래 국립초는 난로 피우고 바닥 청소를
학생들이 직접 한다고 들었다고..
다들 아~~~ 하는 반응.
기분 나쁜.. 반응.
분명 조롱하는 것도
부정적 시선으로 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의 무색함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공중에 떠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속에 무언가가 끓어 오름을 느꼈다.
물론 내 외관상 모습 덕에 하나도 굴하지 않고 당당해 보였지만..
(아파도 아파 보이지 않고, 미안해해도 미안한 기색이 안 보이는 그런 얼굴인지라..)
그 대여섯 명 중에 어떻게 그 자리에 나만 국립초를 나온 것일까?
그날 알았다.
8학군이 있다라는 것도..
나라에서 지원해 주는 초등학교를
굳이 비싼 돈 내고 가는
사립초등학교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사립초등학교에 다녔다는 사실도..
그 자리에서 난 충격을 받았지만
굳이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절! 대! 티 내고 싶지 않아서
더 당당하게 굴었다.
별거 아닌 거에 시비를 걸기도 하고
술 안 따라준다는 이유로 집에 간다고도 했었으며
내가 잘 아는 부분으로 화재를 돌려 얘기하며
면박을 주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나를 받아 주었다.
있는 그대로~
신기한 건 내가 당당하게 대할수록
그들은 나에게 더 호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때 알았다.
내가 나한테 지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럼 남들도 나를 업신여긴다는 것을
‘뭐야? 우리 엄마는 왜 날 사립초를 안 보낸 거야?
아냐~ 울 엄마도 사립초가 있었는지도 모르셨을 거야~ㅠ
아이참! 나 같은 사람을 사립초에 보냈어야지.. ㅠ
아마 내가 사립초 나왔으면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텐데..
다들 울 엄마한테 고마워해!
내가 사립초 안 나와서 이 자리에 있는 거니까!’
그때 내가 했었던 말들이다.
그들은 내가 하는 말에 웃으며 동의해 주며
좋은 분위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젊은 남녀들 간에
썸이라는 게 떠다니는 분위기여서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사건은 말 그대로 culture shock였다.
지나면 지날수록 생각나는 일이었다.
‘왜 내 잘못도 아닌데 내가 작아지는 거야?’
끝도 없는 화가 났다.
급기야.. 나도 모르게..
엄마에게 평생 지우지 못할 상처를 주었다.
말이 칼이 되어..
엄마는 잘 살지도 못하면서 왜 애를 셋이나 낳았냐고..
애들 유학도 못 보낼 거면서 애는 왜 낳았냐고..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을..
그때 당시 나는 혼자 오롯이 이 일을 감당하는 게 불가능했었던 것이었을까..
너무나 잘나고 싶은 20대에
빛나지 못하는 나를
나 스스로 어찌할 바를 몰랐던 때에..
그리고 이에 대한 사과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친정 아빠 칠순 잔칫날,
부모님께 쓴 편지에서
이 사건을 읽으며.. 펑~펑~ 울으며..
죄송한 마음을 전달했다.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사람이 된 것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 봐야 아는
그런 인간이었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다.
그간.. 나는 아팠던 것일까?
그간.. 나의 자격지심은
창피한 줄도 모르고
어디에서 어떤 얼굴을 들고
얼마나 나다녔던 것일까?
기억할 수도 없고
내가 인지 못했을 수도 있는
그 나약하고 상처 났던 영혼이
이제 딱지가 앉아 새살이 돋아나
지금의 내가 되었다.
이제는
그 옛날 못났던 나까지 안아주는
그런 ‘나’이고 싶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겠지만..
내 상처를 꺼내
나 스스로를 보듬어 주고 싶다.
이젠 이런 마음에 당당할 수 있노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차고 넘치는 내가 되었다고!
사진출처: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