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서쪽 마을, 서촌을 만났다. 서촌 유스퀘이크로 브런치 10주년 팝업 전시를 보러 간 것이 행운이었다. 도심 한복판의 오래된 동네가 특유의 정취로 와닿았다. 서울시내가 맞나 싶게 예스러운 골목길에 늘어선 낮은 한옥들과 다세대주택들이 추억을 소환하고, 그 사이에 카페와 음식점들이 뒤섞인 풍경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동네를 느릿느릿 몇 걸음 걸어본 것으로도 마음이 끌리고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경복궁을 몇 번 왔어도 광화문을 이용했고, 젊어서 교보문고를 자주 들락거리면서도 지척에 있는 서촌엔 발 디딜 일이 없었다.
정감 있고 사람의 향기와 따뜻함이 느껴지는 이곳에 왠지 자주 오게 될 거 같다. 브런치 전시를 본 후 보리밥과 수제비로 점심을 먹고 서문인 영추문을 통해 경복궁에 들었다.
오행에서 서쪽은 가을을 나타낸다. 가을(秋)을 맞아(迎) 서쪽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로 영추문(迎秋門)이라 하였다. 동쪽 문은 '봄이 시작되는 문'이라는 뜻으로 건춘문(建春門)이다.
영추문을 지나자 고궁의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마법의 문을 통과한 듯 번잡한 도시는 갑자기 한적하고 조용해졌다.
몇백 년의 시간이 더께더께 쌓인 고궁의 뜰에 낙엽이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과거로 시간 여행을 온 기분으로 산책길을 걸었다. 맑고 파란 쾌청한 하늘에 구름이 그려낸 아름다운 문양들을 이고서 고궁은 가을로 물들고 있었다.
숱한 사건과 사람들을 보아온 궁은 그 오랜 역사를 간직한 채 낮은 모습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며, 담장 너머 혼잡한 도심의 빌딩 숲에서 바쁜 일상을 살아 낸 사람들에게 잠시 휴식과 위로와 감동을 주고 있었다.
경회루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말이 필요 없는 풍경이다. 늘어진 수양벚나무 가지가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연분홍 꽃잎이 흩날리던 봄 풍경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그려보았다.
머리에 맴돌던 쓸데없는 상념들이 맑은 바람 한자락에 모두 날아가 버렸다.
수많은 연회가 열렸을 경회루가 연못의 잔잔한 물결에 투영되어 일렁거리는 모습은 과히 외국인들의 눈길까지 사로잡을 만큼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고궁도 이제 더 이상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못지않은 열기가 곳곳에 넘쳤다. K-팝은 물론이고 K-컬처에 목마른 외국인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즐거워하며 우리의 역사를 보고 듣고 알아가고 있었다. 화려한 단청과 아름다운 기와 곡선, 담장을 배경으로 한국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외국인들의 수가 내국인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멀리서 병풍처럼 경복궁을 에워싼 채 내려다보고 있는 북악산과 인왕산의 위용은 또 얼마나 멋지던지 탁 트인 시야가 가슴까지 시원하게 했다.
경회루 앞뜰에 뒹구는 맑은 가을 햇살, 선선한 바람과 함께 나의 마음도 마음껏 부풀고 쉬고 놀며 오래 머물렀다.
경복궁을 대표하는 중심 건물, 근정전을 지나 근정문, 흥례문을 거쳐 광화문으로 나오는 길목마다 외국인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는 물론이고 여러 언어들이 뒤섞이는 걸 들으며 서울은 세계의 도시임을 실감했다. 한복이 불편하고 어색할 법도 한데 카메라 앞에서 저마다 맵시를 뽐내며 함박웃음을 짓는 그들의 모습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도 일었다.
때마침 수문장 교대식이 있었다. 깊고 장엄한 북소리가 가을 하늘에 울려 퍼지고, 원색 복장을 갖춘 수문장들이 절도 있게 들어왔다. 흥례문 앞을 빽빽이 둘러싸고 숨을 고른 채 지켜보던 관광객들은 일제히 셔터를 눌렀다.
경복궁은 오랜 역사 속에 잠들어 있는 궁이 아니라, 북소리처럼 세계 속으로 깊고 넓게 퍼져나가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임을 보았다.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기를 기원하는 이름답게 경복궁은 세계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서촌을 만나 그림을 보듯 골목을 걷고, 경복궁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담으며 마음 한쪽이 채워지고 따뜻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