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비가 내린다.
연일 하늘이 비구름으로 칙칙하다.
비에 젖은 10월이 가을 같지 않고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거실 창으로 보이는 공원 길도 한적하고 고요하다.
축축한 이런 날은 집에 있게 된다. 늙은 호박이 눈에 들어왔다. 여름 끝에 속달동에서 수확해 온 늙은 호박 중에서 가장 실하고 묵직한 것을 골랐다. 호박죽을 끓이며 부엌에서 가을을 만났다.
여름 뙤약볕과 땅기운을 가득 머금은 듯 누런 황금빛의 늙은 호박. 옴팍옴팍 골진 주름이 마치 커다란 꽃을 피운 듯한 모습. 몇 주 숙성이 되어 뽀얗게 분까지 올랐다. 펑퍼짐한 모양이 맷돌 같기도 하고 둥글고 예쁜 신데렐라 호박마차를 떠올리게도 한다.
딸이 왔다 가면서 할로윈 장식용으로 호박 등을 만든다고 가져가고도 몇 통이 남았다. 같은 한가위 보름달을 보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꾸는 것처럼 우리는 호박을 보면서도 각자 다른 생각을 한다.
나에게 늙은 호박은 호박죽이다.
칼집 내기가 힘들 정도로 단단하고 커다란 호박을 힘껏 갈랐다. 쩍 벌어진 속살이 당근보다 더 고운 주황빛으로 펼쳐졌다. 단풍인들 이 보다 더 고울까. 잘 익은 제철 식재료는 그 계절의 색과 맛과 향을 듬뿍 담고 있다. 호박을 써는 도마가 마치 팔레트 같다. 마침, 라디오 '김정원의 아름다운 당신에게'서 비발디의 <사계> 중 <가을>이 흐르며 달착지근한 호박 향을 더욱 감미롭게 한다.
호박 손질은 쉽지만은 않다. 단단한 껍질을 벗기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가을 향기를 가득 머금은 건강한 자연 향내가 솔찬히 좋다.
늙은 호박의 달달한 맛과 부드러운 식감, 찹쌀의 걸쭉함이 어우러진 한 그릇에 구수한 팥 한 줌을 올린 한 끼가 찌뿌둥한 날씨마저도 기분 좋게 한다.
집집마다 밥상의 색과 맛이 다르다.
속달동 텃밭을 가꾸고부터는 언제나 우리집 가을 아침 상엔 노란 호박죽이 오른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 색. '가을 우체국 앞에서' 노래가 떠오르는 색. 제철 밥상에서 먼저 계절을 느낀다.
어릴 적 안방 윗목 시렁 위에 신줏단지처럼 모셔져 있던 늙은 호박들은 그리 반갑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땐, 가을부터 겨울까지 오일장 돌아오듯 밥상에 단골로 등장하는 호박국, 호박죽이 썩 내키지 않았다.
세월과 더불어 겉모습 못지않게 입맛은 변했고, 인생의 가을을 지나며 또 한 번의 가을을 맞았다. 친구 같은 10월 속에서 나는 다시 호박죽을 끓인다. 비 내리는 가을날, 늙은 호박이 피운 깊은 맛으로 몸과 마음이 따뜻해진다.
밥상에도 입맛에도 가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