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끌리는 사람이 있다.
첫 만남에 편안하고 마음이 가는 들국화 같은 사람.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서촌이 그랬다. 또 하루, 가을 오후를 서촌에서 보냈다. 책 한 장을 넘기듯, 박노수미술관에서 서촌을 읽는 시간이었다.
경복궁역에서부터 박노수미술관까지 걷는 길 또한 서촌을 한 장 한 장 읽어가는 시간이었다.
마침, '서촌브랜드위크' 기간이라 골목과 한옥, 작은 공간들이 책장이 되고 서재로 변해 있었다. 곳곳에 마련된 책들을 보고, 낙엽 사이로 번지는 서촌의 웃음소리를 듣고, 작은 가게에서 소소한 것들을 구경하고, 좁은 골목길 풍경을 사진에 담고, 통인시장에서 꼬치어묵을 먹었다.
이상하게도 자주 다녔던 듯한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지난겨울 치앙마이 한달살이를 하면서 매일 걸었던 골목 풍경과 닮아서일까. 낮은 집들과 좁은 골목길에 어릴 적 살던 고향마을의 정겨움이 묻어나서일까. 낡고 오래된 것들이 주는 편안함과 따뜻함은 물론 멋스러움이 더해져 서촌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길모퉁이 골목 끝에 박노수미술관이 있었다. 종로구립 미술관으로 박노수 화백이 살았던 88년 된 구옥은 미술관이라기보다 박노수 화백의 삶을 들여다보고 작품을 통해 그를 만나는 작은 공간이었다.
한국화가인 남정 박노수 화백이 40여 년간 거주하던 집을 아름다운 미술관으로 꾸며서 그의 작품과 고미술품, 수석, 고가구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정문을 들어서자 가을 오후의 노란 볕이 앞뜰 정원에 쏟아지고, 조각품들 사이로 오래된 감나무엔 잘 익은 감들이 정취를 더했다. 언덕배기 뒷동산은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으로 모감주나무가 있고, 미술관 지붕 위 굴뚝 너머로 서촌마을이 내려다보였다.
내부엔 미술관 개관 12주년을 맞아 기념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박노수 화백의 산수화와 화조화 작품을 중심으로 그의 예술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한지에 수묵담채로 그려낸 자연은 단순한 풍경을 넘어, 삶과 예술에 대한 통찰, 자연을 바라보는 화가의 사유를 담고 있었다. 그림마다 고요한 산수와 그 안에서 유유자적하는 인물의 모습이 조화롭고 청아해서 마치 내가 그 그림 속 인물인 듯 마음이 잔잔해졌다.
<강> (1990년대 후반) 전시회 리플릿 사진
<수변> (1992년) 전시회 리플릿 사진
대표작 <수변>은 언덕 위에 앉은 소년이 먼 산을 바라보고, 강 위에는 배 한 척이 떠 있는 산수풍경화이다. 한적한 분위기, 하얀 여백이 마음까지 여유롭고 평화롭게 했다. 그림도 음악 같아서 마음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적시기도 한다. 내부는 사진 촬영 금지라 오히려 작품에 몰입하여 그림 속 분위기에 감정이입이 되었다.
풍경 스케치를 보면서는 나도 어반 스케치를 배워 서촌의 풍경과 사람들을 담고 싶은 욕구가 꿈틀댔다.
박노수미술관은 예스러운 것들 속에 새로운 발견이 있는 서촌의 감성과 꼭 닮은 미술관이다. 정원에 놓인 돌확의 물풀과 맑은 물까지도 작품이 되어 박노수 화백의 그림처럼 여백의 미가 있고 깨끗했다.
박노수 화백의 삶과 예술이 스며 있는 미술관 곳곳에서 그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서촌에서의 가을 오후가 내겐 한 편의 이야기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