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가까웠다.
설밑은 괜히 마음부터 분주하다. 그 부산함은 그리운 이들을 맞이하기 위한 정성 어린 과정일 것이다.
어린 시절, 설을 앞둔 시골집은 매일 분주했다. 달력이 아니어도 엄마의 펄럭이는 치맛자락에서 명절이 가까웠음을 읽었다.
설맞이는 마당에 짚을 깔고 놋그릇을 닦아 노랗게 광을 내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맷돌 돌아가는 소리, 조청 고는 냄새, 아궁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캐하면서도 따스한 연기.
그 소란함 속에서 나는 무를 깎아 먹으며 입가를 적시던 그 서늘한 단맛을 기억한다. 과일이 귀하던 시절, 무 구덩이에서 갓 꺼낸 무 한 토막의 청량함은 고향의 맛으로 각인되었다.
온 친척들이 다 모였던 유년의 명절과는 달리, 이젠 설이라고 해야 아들딸이 와서 네 식구가 모이는 단출한 시간이지만 벌써부터 먹거리에 마음이 쓰인다.
입춘이 무색하게 다시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날씨, 속달동 텃밭 한구석의 무 구덩이를 조심스레 열었다.
부모님의 나이를 훌쩍 넘어 준비하는 설이지만, 땅속 깊은 온기를 품은 무 구덩이를 열 때는 여전히 소녀 같은 설렘과 경건한 떨림이 교차했다. 흙 묻은 무를 꺼내면서 단순한 식재료가 아닌, 땅이 숨겨둔 새해의 복을 길어 올리는 기분이기도 했다.
구덩이 속 볏짚을 걷어내자 뽀얀 몸통을 드러낸 무와 주황빛 당근이 마치 어제 묻은 것처럼 선명한 빛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지난가을, 김장하고 남은 것들을 묻은 것이다.
손끝에 닿는 무의 감촉은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겨우내 응축된 알싸한 달큼함이 그득했다.
대충 껍질을 깎아내고 한 입 베어 물자, '아작'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시원한 단맛이 입안 가득 번졌다. 바로 어릴 적 그 맛이다.
아삭한 식감도 늦가을 그대로다. 퇴비를 많이 안 해서 작지만 단단하고 매끄러운 몸매도 여전하다. 당근은 색까지 곱다.
흙이 가진 천연 냉장고의 위력에 새삼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일었다. 겨우내 얼어붙은 땅 밑에서 이 작은 것들이 숨을 죽이며 봄을 기다렸을 생각을 하니 기특하기까지 했다.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면서도, 무 구덩이 속에 묻어두었던 어린 날의 따뜻한 기억이 다시금 고개를 들며 마음 한구석이 훈훈해졌다.
봄이 오는 길목, 시장에는 월동무 대신 제주 햇무가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햇 것이 좋다지만 월동무의 깊은 맛에 비할까.
겨우내 땅의 온기를 품고 버텨온 이 정직한 수확물은 우리의 설 밥상에 오를 것이다.
시원한 소고기뭇국으로, 보드라운 무나물로, 개운한 나박김치로, 아삭한 무생채로도, 가족들의 입맛을 깨울 것이다.
화려하진 않아도 자연이 제 속도로 빚어낸 이 작은 식재료야말로 한 해를 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밥상을 맛나게 할 것이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무 구덩이 열자 그리웠던 음식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갈치무조림, 뭇국, 무전, 무생채, 콩나물무밥, 무 어묵탕...
곧바로 저녁밥상의 주인공은 무가 되었다. 무생채와 코다리무조림을 올렸다. 상큼한 무생채 한 젓가락이 입안 가득 봄을 몰고 왔다. 코다리 맛이 밴 슴슴한 무 한 토막에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설밑의 부산함은 단순히 음식을 장만하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얼어붙은 땅속에서도 생명을 지켜낸 무처럼, 거친 일상을 견뎌온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다독이며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다.
밥 한 끼로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따뜻한 시간이 꽃샘추위를 뚫고 오고 있다.
이번 설에는 아이들에게도, 다른 누군가에게도 무처럼 시원하고 달큰한 위로가 되어줄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을 보듬기 전, 나 자신에게도 무나물처럼 담백한 시간을 선물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