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보다 먼저 온 손님

by 지현옥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그렇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처럼 한 사람이 왔고 많은 것들이 함께 왔다.

얼마 전, 전혀 예상치 못한 블로그를 통해 연락이 왔다. 돌아보니 십 년 전쯤에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던 후배였다. 은퇴 후 까마득히 잊고 지냈는데 블로그에 남긴 댓글은 놀랍고도 반가웠다.


더욱 반가운 것은 내가 가꾸는 속달동 뜰을 잘 알고 있었다.

도보로 10분 남짓한 바로 옆동네 대야미에 오래전부터 살고 있다고. 가끔씩 산책할 때 속달동 우리 터전을 지나다닌다고. 예쁜 꽃밭을 보며 가꾼 손길이 누구일까 궁금했다고. 앞 다랑이 논두렁에서 쑥을 캐기도 했다고. 기분 좋은 말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오늘 그녀가 속달동에 왔다. 혼자가 아니라 지나온 날들과 주변 사람들의 안부도 함께 데리고 왔다. 앳되고 고왔던 그녀 얼굴에도 세월은 지나고 있었지만 여전히 에너지가 넘치고 활기차 보였다. 이젠 그녀도 퇴직을 생각하고 있다며 그간의 이야기로 2시간이 훌쩍 갔다.


깜깜이 잊고 지내던 사람들이다. 학교 울타리를 벗어난 지 벌써 몇 년째. 이제 보드마커보다 호미 자루가 손에 더 익숙하고 편하다. 아이들이 아닌, 꽃과 나무와 새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놀고 지낸다.

함께했던, 기억 속에 아련한 이름들을 들으며 어렴풋이 얼굴들이 스쳐갔다. 다들 열심히 살고 있다는 이야기보다 편안하다는 근황이 더 귀에 들어왔다.


그녀도 퇴직 후의 꿈꾸는 삶이 마당 있는 집에서 사는 거라며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이곳에 오는 많은 이들이 왜 잔디를 심었느냐고, 밭으로 일구어 채소를 더 심으라고 하지만 밭보다 마당이 넓은 이유를 그녀는 아는 거 같다. 덜 먹어도 마당은 내게도 로망이었다.


오늘따라 바람은 차고,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휘몰아쳤다. 지펴놓은 장작불도 연기만 꾸역꾸역 내며 재를 날리고 온기를 주기엔 부족했지만, 비닐하우스 안에서 따뜻한 감잎차 한잔으로 몸을 데웠다.

지난해 늙은 살구나무 한 그루가 준 새콤달콤한 살구쨈을 빵에 곁들여 먹으며 많은 이야기와 웃음이 오갔다.


단단히 챙겨 입고 오라고 미리 말해주지 못한 게 민망해서 이곳에 단칸방 집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집이 아니라 부담 없이 올 수 있는 거라며 그녀는 오히려 자주 오겠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오는 사람도, 오라는 사람도 서로 크게 마음 쓰이지 않는다는 면에서 그냥 마당만 넓은 지금이 좋을 수도 있겠다.


우쿨렐레를 배우고 있다고 레슨시간이 다 돼서 간다며 배낭에 넣어온 것들을 하나씩 꺼내놓았다. 고춧가루, 커피, 대봉 냉동홍시까지.

추위에 떨다 가는 그녀에게 다시 오라는 말도 못 하고 총총히 사라지는 뒷모습만 오래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을 주섬주섬 챙겨 집에 돌아와, 주고 간 달콤한 아이스 홍시를 먹으며 카톡을 보냈다. 몸살 나지 않았을까 걱정된다고.

그녀가 보내온 답이 봄 햇살 같았다.


"그리 약골은 아닙니다. 이상 없습니다.ㅎㅎ

자주 놀러 갈게요. 대야미에 눌러 살 이유가 하나 더 생겨 넘 좋아요."


대야미에 눌러 살 이유가 나라는 한마디가 가슴을 훈훈하게 했다. 비록 무심히 던진 말일지라도 건조한 마음이 촉촉해졌다.


정현종 님 시구처럼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로 많은 것이 함께 온다. 그녀가 왔고, 옛날의 추억이 왔고, 앞으로의 만남도 왔다. 무엇보다 그녀의 마음이 왔다.


때론 사람에 치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온기로 따뜻해질 때가 더 많다.

봄보다 먼저 온 손님이 마음속에 봄꽃을 활짝 피웠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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