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 내려앉은 봄의 기척

by 지현옥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이 지나자 속달동 마당도 확연히 달라졌다. 겨우내 죽은 듯 고요하던 마당은 이제 생의 기세로 꿈틀댄다. 절기에 맞춰 달라진 햇살과 바람이 마당 구석구석을 돌며 봄을 깨우고 초록을 부르고 있다.


봄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이 맘 때의 봄은 자세히 보아야만 보인다. 매년 오는 봄이건만 마당에 내려앉은 봄의 기척은 언제나 그랬듯 새롭고, 처음처럼 설렌다.



양산 통도사엔 매화가 한창이라는데 산자락 동네 매화나무는 꽃잎을 열까 말까 망설이며 이제 기지개를 켜고 있다.


​매일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꽃눈을 들여다보며 마음도 함께 부풀어 오르고, 하루가 다르게 색이 더해지는 꽃망울을 보며 마음도 봄빛으로 물들어간다.


청매는 연둣빛 꽃받침을 열고 하얀 꽃잎터지려 한다. 홍매는 발그레한 눈꺼풀을 치켜들었다.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리듯 매화 한 송이 활짝 열리는 날, 내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팡 터질 것만 같다. 그걸 보려고 매화나무 아래서 오래 서성인다.



산수유는 오늘내일 폭죽을 터트릴 기세다. 갈색 꽃받침을 열어 노오란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어서 나와도 된다고 봄볕이 간지르고, 봄바람이 스치며 살랑댄다.


어스름이 내리면 정원 등에 하나둘씩 불이 켜지듯이 꽃잎 터지는 봄날의 노란 불꽃놀이를 놓치지 않으려 산수유나무에도 자꾸만 눈길이 간다.


땅에서도 굳어 있던 흙살을 뚫고 초록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작년의 시든 잎을 거름 삼아 다시 연둣빛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월동 시금치가 너풀대며 올라오고, 대파도 누런 잎새 사이로 뾰족이 초록을 내밀었다. 겨울을 이겨낸 양파도 햇살 처방을 받고 깨어나고 있다.



마당이라는 도화지에 봄볕이 조금씩 색을 칠하고 있다. 울타리 밑에는 상사화가 손톱만큼씩 얼굴을 내밀었다. 돌틈사이로 올라오는 수레국화 새잎에도 괜스레 코끝이 찡해진다. 햇살이 머문 자리마다 돌나물도 바글바글 번지고 있다.


나도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처럼 웅크리고 있던 몸을 슬슬 텃밭에서 푼다. 거름을 뿌리고, 흙을 뒤집고, 고랑을 만든다. 텃밭은 마음 가는 대로 그리고 싶은 것을 채워가는 나만의 캔버스.


무얼 그릴까. 아니 무얼 심을까. 상추, 완두콩, 감자, 고추, 오이, 가지. 쑥갓도 빼놓을 수 없다. 푸성귀로 실컷 먹고 6월이면 텃밭 한구석을 노랗게 물들이는 향채소, 내가 좋아하는 쑥갓 꽃이다.



낮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지만 속달동의 하루는 이렇게 훌쩍 지나간다. 좋아하는 일이라 재미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오랜 세월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만 하는 일'에 집중하며 살았다. 이젠 계절의 변화를 몸소 느끼고 가까이서 지켜보며 하고 싶은 일로 분주하.


마당에 내려앉은 새봄의 기척을 마주하며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도 있다. 봄은 단순히 계절의 순환이 아니라, 상실을 딛고 다시 서게 하는 가장 아름답고 힘 있는 강의라는 것을. 봄에는 내가 바라보는 모든 '봄'이 기쁨이고, 배움이 되고, 희망이 된다는 것을.


또 한 번의 찬란한 봄을 마중하며 연인을 기다리듯 두근거린다. 나는 마당 위에 쓰일 눈부신 서정시의 첫 번째 독자가 될 것이다. 나날이 달라지는 마당의 표정을 살피고, 따스한 바람에 실려 오는 흙내음을 맡고, 살아있음을 만끽하며, 봄의 기쁨을 맛볼 것이다.


매일이 다르게 쏟아지는 봄의 기척. 그 속에 섞여 나 또한 한 송이 꽃처럼, 한 줄기 바람처럼 이 계절을 온전히 살아가고 싶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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