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빗방울이 후득이는 새벽에 다낭 공항에 발을 디뎠다. 생각보다 찬 비였다. 다낭의 1월은 서늘한 우기라는 걸 첫 대면에서 알 수 있었다. 열대 휴양지 분위기와는 다른 싸늘한 밤공기에 한국서 입고 갔던 경량 패딩 점퍼를 꺼내 입었다.
인천공항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소박한 규모와 시설, 지체되는 수하물, 한산한 새벽임에도 느린 입국절차에서 베트남에 왔음을 실감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택시 기사님의 선한 미소에 밤길임에도 마음이 놓였다. 트렁크를 호텔 프런트까지 친절하게 옮겨주는 기사님 덕분에 다낭의 첫인상은 비오는 날의 커피 한 잔처럼 스며들었다.
숙소도 만족스러웠다. 가격대비 기대 이상으로 깔끔하고 넓었다. 트윈 룸 공간이 넉넉하고 창밖 뷰도 좋아 거점 숙소로 오래 머무르는데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겨울마다 다낭에서 보내는 남편 친구가 추천한 호텔로 지인 찬스가 한 몫을 했다.
호텔 체크인 후 잠깐 눈을 붙였을 뿐인데 2시간 시차 때문인지 저절로 눈이 떠졌다. 창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에 젖는 여행지의 아침이 행복일지 아쉬움일지는 생각 나름이다. 아무 서두를 일 없는 주말 아침의 포근한 이불속 같은 안락함이 찾아들었다.
어느 누구, 무엇 하나 방해할 것 없는 여행지에서 마음껏 늘어져 보는 여유도 여행에서 누리는 행복이다. 어쩌면 나는 대단한 무엇보다 이런 소소한 순간을 아끼는지도 모른다.
느지막이 거리로 나왔다. 비내리는 골목길에 풍겨나는 구수한 쌀국수 냄새와 커피향이 식욕을 돋우었다. 소고기 쌀국수와 반미로 브런치를 먹었다. 국수 국물은 맑고 깊었다. 고수향이 살짝 가미된 계란 반미는 바삭한 식감에 고소하고, 상큼했다. 따끈한 국수와 빵 한 조각이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음식에 입가림이 심한 편인데 첫 끼부터 성공이었다.
베트남의 스타벅스라는 하이랜드 커피점으로 옮겨서 라테 한 잔을 놓고, 비에 젖는 미케 비치를 바라보았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해변을 한 폭의 수묵화로 만들었다. 잘 도착했노라고 아이들에게 인증 사진과 톡을 보내고, 길거리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행렬을 보며 남편과 노닥거렸다.
미케 비치는 곱고 하얀 모래가 호이안까지 20킬로 길게 이어진 해변으로 미국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6대 해변에 속한다. 바닷가 뒤로 늘어선 고층 호텔들이 마치 부산 해운대 느낌이고,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과 고운 모래는 호주의 골드코스트를 연상케 했다.
산과 숲을 좋아하고 나무와 꽃을 사랑하지만 철썩이는 파도와 펼쳐진 하얀 모래를 보고는 어찌 신발을 벗지 않을 수 있을까. 우산을 쓰고 걸었다. 맨발에 와닿는 밀가루처럼 곱고 찰진 모래의 감촉에 무뎌진 감각이 살아났다.
여행 비수기에 비까지 내리는 바닷가라 해변을 통째로 차지했다. 비가 준 행운이었다. 넘나드는 파도 소리와 우산에 후둑이는 빗소리만이 고요를 깨웠다.
비가 몰고 온 회색빛이 온통 하늘을 덮고 바다까지 스며들어 흑백 사진 속 풍경 같았다. 감독의 최종 OK 사인을 기다리는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걷고 또 걸었다. 아니 OK 사인은 필요 없었다. 얼마든지 걸을 수 있고, 더 걷고 싶었다.
온갖 문명의 이기에 혹사당해 시리고 지쳐있던 눈은 하룻만에 한층 편해졌다. 파도가 밀려나며 빠져나가는 고운 모래알들이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마사지 이상이었다. 부서지는 포말이 모래를 다시 가지런히 정돈해 놓고 돌아갈 때엔 세상의 소음과 근심도 함께 가져가는 듯 멀어졌다.
무언가에 잔뜩 소진되었던 기운이 다시 채워지는 느낌. 잘 왔다. 미케 비치 만으로도 이곳에 올 이유가 충분하다. 많은 여행객들이 다낭을 선택하고, 이곳 주민들이 다낭을 사랑하는 이유가 미케 비치 때문이라고 서슴없이 말할 만하다.
여행은 지도가 정확한 지 대조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헤매다 보면 차츰 길이 보이고, 어느 낯선 골목에서 우연히 듣게 되는 음악처럼 예상치 못한 기쁨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아침저녁으로 미케 해변을 걷고, 베트남 음식을 먹으며, 다낭을 알아가는 색다른 날들, 즉 '다낭살이'가 시작되었다. 예상치 못한 기쁨과 마주할 순간들이 많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