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바이 렌트 이틀째.
발에 날개를 달았다. 어디든 자유롭게 원하는 곳을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자유여행의 매력인 만큼 오토바이 도전은 신의 한 수였다.
오늘은 시장 구경에 나섰다.
미케비치에서 살짝만 안쪽으로 발을 들이면, 현지인들의 생생한 삶이 파도처럼 넘실대는 곳이 있다. 바로 '박미안 시장'이다.
시장에 가는 이유가 싼 가격과 덤이라는 인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행지에서는 현지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다.
첫날 들렀던 '한 시장'이 여행객들을 위한 곳이라면, '박미안 시장'은 주로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재래시장이다. 투박하지만 정겨운 다낭의 진짜 얼굴이 이곳에 있다. 로컬 시장의 소박함과 다소 지저분함을 즐길 준비가 되었다면, 이곳에서 여행은 훨씬 다이내믹하고 풍성해진다.
시장 입구는 남대문 시장을 방불케 했다. 오토바이 부대와 장을 보러 나온 주민들로 북적였다. 좁은 통로를 지날 때마다 여기저기서 '엠 오이'가 들려왔다. '엠 오이'는 베트남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말이다. 주로 식당에서 들었는데, 떠들썩한 시장에서도 잘 들릴 정도로 벌써 귀에 익었다.
이색적인 먹거리, 다채로운 색감, 독특한 시장 냄새와 다양한 표정들에서 역시 활기가 느껴지고 삶의 에너지가 전해졌다. 어딜가나 먹고 사는 문제보다 중요한 건 없다.
연중 농산물 재배가 가능한 날씨 덕에 좌판에 놓인 싸고 풍성한 야채, 광주리마다 그득한 원색의 과일들이 오감을 자극했다. 새빨간 람부탄과 이름 모를 채소들, 특히 베트남 식탁에 빠지지 않는 고수와 탱글탱글한 라임을 보자 진하고 상큼한 향에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과일 코너에서 머뭇거리는 나에게 눈치 빠른 상인 아주머니가 탁구공 크기의 초록 과일을 건넸다. 사과인 줄 알았는데 대추 '따오 따'라고 했다. 아삭한 식감에 달지 않고 즙이 많았다. 덕분에 '따오 따'를 사고, 귤 크기의 작은 오렌지도 샀다. 지난번 '한 시장'에서 그린 망고 맛을 알게 된 후 찐 팬이 되었다, 초록 대추도 그에 못지않게 친해질 것 같은 슴슴한 맛이었다.
박미안 시장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아보카도 아이스크림을 맛보지 않고는 박미안 시장을 말할 수 없단다. 사람들을 헤치고 시장 안쪽 깊숙이 들어간 이유는 바로 명물 아보카도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서다. 더욱이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남편이라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낡은 플라스틱 목욕탕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아주머니의 현란한 손놀림이 시작되었다.
잘 익은 아보카도를 슥슥 으깨어 컵 바닥에 깔고,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넉넉하게 얹은 뒤, 그 위에 코코넛 슬라이스와 곡물 플레이크를 아낌없이 뿌려주었다.
부드러운 아보카도의 풍미와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섞이며 단돈 몇백 원(수만 동)의 행복이 입안 가득 퍼졌다. 크리미한 아보카도, 코코넛 아이스크림, 바삭한 플레이크가 어우러진 삼합이 박미안 시장의 맛으로 남았다.
박미안 시장은 다낭 사람들의 삶이 녹아있고, 그날 그날의 치열한 하루가 살아 숨 쉬는 가장 다낭다운 온도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롯데마트도 갔다.
다낭에도 한국 규모에 버금가는 롯데마트가 있다. 재래시장과 마트를 비교 분석하기 위한 시장조사라도 나온 듯 층층이 둘러보았다. 커피 산지답게 커피가 가장 많았다. 스치는 얼굴들을 떠올리며 종류별로 담았다. 가볍고 부피가 작아 제한된 여행트렁크에 담아 갈 선물로 딱이었다. 햇반부터 라면까지 한국 식품들도 귀한 몸으로 모셔져 있었다.
KFC와 롯데리아에서 풍기는 패스트푸드의 자극적인 냄새가 유혹했다. 평소에는 내키지 않는 음식이지만 닷새째 베트남 음식으로만 견뎠으니 당연했다. 김밥 코너에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침샘이 요동쳤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일단 롯데리아에서 스파게티와 프라이드치킨으로 위를 달래고 김밥을 챙겼다.
돌아오는 길에 한강 하구 외딴 마을 카페에 들렀다. 한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이다. 고기잡이배가 떠있는 바다 풍경이 창에 걸려있고 은은한 백합 향기가 머무는 자리에서 라테 한 잔은 노곤한 오후를 평온하고 달콤하게 녹여 주었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이런 시간을 위해 우리는 여행을 떠나는 건지도 모른다.
어느새 카페 근처 투안프억 현수교 너머로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박미안 시장에서 보았던 잘 익은 파파야 속살 같은 주황빛 노을이 물 위로 고요히 번지고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일몰을 지켜보았다.
남편도 나도 하루의 끝자락에서 고단했던 하루를 위로하는 석양의 찬란한 빛을 숨죽이고 바라보았다. 우리의 황혼도 저토록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다.
언젠가 다낭을 추억하며 꺼내 볼 감동과 아쉬움의 한 조각을 어둠이 내릴 때까지 지켜보며 가슴속에 소중히 끼워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