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이안에서 유유자적

by 지현옥


조용한 호이안의 아침을 맞았다.

밤새 거리를 수놓았던 등불은 꺼졌고, 관광객들로 북적였던 좁은 골목마다 진한 쌀국수 육수 냄새가 구수하게 풍겨 났다.


느지막이 아침 산책을 나갔다가 가장 호이안스러운 풍경과 마주했다. 오랜 세월을 머금은 빛바랜 노란 담장 너머로 붉은 부겐빌레아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일렁이는 꽃무리는 정열적인 플라멩코 무용수의 치맛자락처럼 출렁였다. 올드타운의 노란 벽과 대비되는 붉은 부겐빌레아의 선명한 색감에 저절로 발길이 멈췄다.



작년 이맘때쯤 치앙마이에서의 추억을 소환하는 풍경이었다. 치앙마이 한달살이를 했던 숙소 골목 카페에도 진분홍 부겐빌레아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꽃그늘 아래 앉은뱅이 나무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유유자적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부겐빌레아는 처음 만남부터 인상적이었다.

강렬한 분홍, 붉은 꽃잎이 살짝만 건드려도 종이처럼 바스락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우리나라 봄꽃 영산홍과 철쭉을 떠올리게 하는 꽃이다. 얇고 파르르 떨리는 꽃잎이 햇살을 받으면 화려한 원색이 더욱 투명하게 빛난다.


곱고 환한 꽃잎에 이끌려 곧바로 우베카페 2층으로 올라갔다. 오전이라 우리만의 공간이었다. 부겐빌레아가 내려다 보이는 발코니에 자리를 잡았다. 살랑이는 바람이 심심치 않게 들락거리는 예쁜 자리에서 반미와 커피로 브런치를 먹고, 여유롭게 낮 시간을 보냈다.



호이안의 낮은 한가하고 느릿하게 흐른다. 2층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는 거리는 정겹고, 오래된 것들에서 나오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세월의 흔적은 지붕 위 기와에도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이끼 낀 지붕들엔 풀꽃들이 자라서 마치 사람 손을 타고 자란 꽃밭 같았다.


바람에 날려 우연히 내려앉은 풀씨 하나가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모습이 어쩌면 우리들의 삶의 모습일 수 있다.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의 삶이 연극 무대 장면들처럼 지나갔다. 사실, 우리는 해 뜨면 막이 오르는 무대 위에서,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연극배우인지도 모른다. 다양하고 생생한 삶의 현장을 내려다보며 한 컷 한 컷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눌렀다.



대나무 바구니를 막대기 양 끝에 매달아 어깨에 메고 다니며 과일을 파는 베트남의 상징 같은 여인들, 골목 모퉁이 노점에서 쌀국수를 마는 투박한 손, 테라스를 올려다보며 마사지를 하라고 유혹하는 손짓들.


누군가에겐 치열한 삶을 누군가는 신기하게 쳐다보며 사진에 담기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아오자이를 곱게 차려입고 한가롭게 활보하는 젊은 처자들도 있었다.



올드타운은 중국, 일본, 프랑스, 베트남식 건축물이 혼재한다.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역사가 깃든 골목에는 구옥에서 빈티지한 물건들을 파는 상점들이 이어진다. 거리를 따라 걸으며 가죽 공예품, 니트 가방, 라탄 백, 주얼리 소품, 각종 의류 등을 구경하는 것으로도 즐거웠다.


이곳에선 먹는 기쁨도 놓칠 수 없다. 투본 강변에 늘어선 레스토랑과 카페는 버라이어티한 베트남 맛으로 행복을 준다. 입만 호강하랴. 저녁이 되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응우옌호앙 거리는 야시장으로 변모하고,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룬다.



빈 트렁크를 가져와서 돌아갈 때에 꽉 채워간다는 한국 여행객들이 많았다. 나도 실크 스카프를 샀다.

프랑스 샹젤리제 거리의 명품 매장에서 산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뚜루마뚜루 두르기엔 오히려 편해서 애용품이 될 거 같다.


오후가 되자 거리는 다시 북적이기 시작했다. 호이안을 상징하는 내원교 아래 노란 담장이 오후의 햇살에 빛났다. 동화 속 그림 같은 거리가 석양에 투영되어 붉게 변하면서 작은 마을은 인산인해가 되었다.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는 시클로까지 더해져 거리는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시클로는 앞 좌석에 승객을 태우고 기사가 뒤에서 페달을 밟아 이동하는 관광용 인력거이다.


어둠이 내리자 올드타운은 투본강과 어우러져 분위기가 더해졌다. 조명과 홍등이 켜지고 소원배의 불빛까지 강물에 쏟아져 반짝였다. 강가에는 연꽃 모양의 종이배를 파는 분들이 보였다. 대부분은 나이가 많았다.



한 개 가격이 1만 동, 한국 돈으로 550원 정도 하는 종이배에 불을 밝히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 것까지 2개를 샀다. 소원배를 띄우며 나의 소원과 더불어, 함지박에 대여섯 개씩 들어있는 그들의 소원배가 다 팔리기를 빌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수많은 관광객들의 소원을 담고 투본강은 점점 물들어갔다.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