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달동 이야기
바야흐로 가을이다.
다시 호미를 들고 전지가위를 들었다. 가을바람과 함께 습기가 날아간 날씨는 어느덧 정원에서 일하는 기쁨을 준다.
농작물이 주인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면 꽃밭도 주인의 손길이 닿기를 기다린다. 텃밭이나 꽃밭이나 잠시만 눈길을 주지 않아도 표시가 나는데, 늦더위에 엄두를 못 내고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꽃밭은 또 풀밭이 되었다. 바랭이, 강아지풀, 여뀌가 점령을 했다.
맘 먹고 꽃밭을 손보기로 했다.
바랭이, 강아지풀, 여뀌는 앞 논두렁에 질펀하게 널린 풀이다. 굳이 싫어하지 않았다. 어느 면에선 좋아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가끔 논두렁을 걸으며 몇 가지씩 꺾어다 항아리에 꽂아 두곤 했다.
바랭이는 벼처럼 피어나 갈대 같기도 하고 가을 분위기 내기에 좋다. 복슬복슬한 강아지풀은 바람에 살랑거리는 모습이 마치 강아지 꼬리 같아서 마음이 간다.
쪽풀을 닮은 여뀌는 요맘때면 붉은 분홍빛의 작은 꽃들이 이삭 모양으로 촘촘히 달린다. 이것 또한 자세히 보면 예쁘다.
이 들풀들이 어느 날부터 내 꽃밭에까지 날아와, 덥다고 빈틈을 보인 사이 자리를 잡았다. 문제는 울타리 밖에 있을 땐 아무렇지 않게 어여삐 보이기까지 하던 풀들이 내 화단에 기거하는 건 용납이 안된다는 것이다. 산책하며 가끔씩 눈길을 주기도 하고 꽃꽂이용으로 들이기도 했었는데, 내 뜰 안에서 사는 건 결코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다.
얼마나 생명력이 강한 애들인지 화단에서 뽑아낸 양이 두 수레가 넘었다. 열매가 영글어 내년에 더 퍼지기 전에 몰아내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손아귀가 아플 정도였다.
쑥부쟁이를 구하고, 구절초도 숨을 쉴 수 있도록 여백을 마련해 주었다. 답답해하던 국화도 하늘이 보이자 기운을 차린다.
아침 햇살이 잠깐 반짝이는 틈을 타 화단 정리를 하며 사람의 알량한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나와 별 상관이 없는 일에는 꽤나 너그럽다. 반면, 나의 생활 반경에 영향을 미치거나, 불이익을 주거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경우는 민감해진다.
한때, 전장연에서 지하철 출근길 시위를 할 때, 나는 그들을 이해하는 입장이었다. 존중은 쟁취하는 것이지 장애라는 동정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그들의 목소리를 내는 거라고 백분 이해를 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4호선 지하철을 타려고 인덕원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장연 시위로 인해 전철 운행이 중단되고 있다는 알림이 갑자기 전광판에 떴다. 오이도역에서 출발을 못하고 있다는 거였다. 예고되지 않은 사태에 출근길 직장인들은 사당행 버스를 타기 위해 역사를 빠져나가느라 아수라장이 되었다. 버스도 만원이라 비집고 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왜 하필 출근길을 막아야 하는 것인지, 미리 예고도 없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인지 그들의 이기적인(?) 행태에 화가 났다.
어떤 쟁점에 의연하다가도 그것이 나와 직접적으로 연결될 때 태도와 생각은 달라진다. 본질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내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기울게 되는 것이 인간 본성이다.
때때로 나의 기분을 즐겁게 했던 들풀도 내 꽃밭을 넘보자 적이 되었다. 적을 소탕하 듯 그들의 짧은 생을 내 맘대로 휘둘렀다. 풀을 뽑을 때마다 강인한 생명력에 대한 경외감과 한낱 들풀이라고 가볍게 내쳐도 되는 것인지 미안함이 교차한다. 그들에게 이 계절은 온 우주일텐데 말이다.
꽃밭을 구하며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개입 사이에서 인간의 본성과 복잡한 인간 사회의 정의로운 질서에 대해서도 되새겨본다. 무엇이든 함께 나란히 가기는 쉽지 않은 걸까. 계절이 바뀌는 때는 생각이 많아진다.
가을 정원은 말끔해졌다. 들풀은 죽고 가을꽃들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