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실장, 결론 없는 이야기만 할 건가?”
김 회장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가르며 튀어 올랐다.
“해보지도 않고 어렵다고만 하지 말라고. 인건비는 계속 오르고, 경쟁업체들은 이미 밖으로 나가고 있어. 방적공장에서 일할 사람도 없는데, 우린 여기서 뭘 더 버틸 수 있겠어.”
고영현 기획실장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해외다.”
김 회장은 단호했다.
“조금이라도 유리한 국가가 있으면, 무조건 현장으로 가. 되는 이유를 가져와. 실행 안까지. 알았으면 나가봐.”
문이 닫히자 회의실의 공기가 한 박자 늦게 가라앉았다.
고 실장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베트남, 중국,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 1년 넘게 돌아다닌 나라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느 한 곳도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회장은 더는 ‘안 되는 이유’를 듣지 않겠다는 얼굴이었다.
고 실장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해외진출 조사팀장, 최치훈 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차장, 자카르타 상황은 어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도 만만치 않습니다. 조건을 맞추려면 부담이 큽니다.”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다만, 어제 스리랑카 쪽에서 제안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보름 전까지만 해도 단칼에 거절하던 사람들이었는데요.”
“스리랑카?”
“예. 꽤 적극적입니다. 내일 아침 7시 비행기로 콜롬보로 가보겠습니다.”
고 실장은 잠시 눈을 감았다.
“도착하면 바로 보고할 수 있게 정리해서 보내줘. 회장님 포함해서 비상회의 잡을 거야.”
“조사팀 어깨에 회사 명운이 걸려 있어. 이번엔 끝을 보자.”
전화기 너머에서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알겠습니다. 몇 달째 해외만 돌다 보니… 이제는 정말 마무리하고 싶네요. 도착해서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콜롬보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푸른 하늘과 야자수가 이어지는 길 끝에 공장이 나타났다.
아무 인연도 없을 것 같던 이 섬나라에서, ‘연남랑카’라는 이름이 떠오르고 있었다.
대회의실 맞은편에 스리랑카 투자청의 알리 사브리 투자과장이 앉아 있었다.
“이곳이 투힐리아 방적공장입니다.”
그는 서류를 밀어놓으며 말했다.
“부지는 넓고, 설비는 이미 갖춰져 있습니다. 당장 가동에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최차장은 서류를 넘겼다.
“인수가격은요?”
“6백50만 불입니다.”
“설비까지 포함해서요.”
“전부입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세제 혜택도 준비돼 있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국세청 관계자가 말을 보탰다.
“처음 15년간은 법인세를 포함해 주요 세금을 면제할 예정입니다. 이후에도 부담은 크지 않을 겁니다.”
조건은 지나치게 좋았다.
너무 좋아서, 오히려 계산이 멈칫거릴 정도였다.
입지도 나쁘지 않았다. 설비 상태도 양호해 보였다.
최차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아꼈다.
“오늘은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내일 같은 시간에 다시 뵙는 게 어떻겠습니까.”
알리 사브리는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다만,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이 조건은, 연남방적에게 드릴 수 있는 최선이라는 점을요.”
그의 영어 발음이 또렷하게 귀에 남았다.
방으로 돌아온 최차장은 자료를 다시 펼쳤다.
숫자, 조건, 위치. 빠진 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이 계속 걸렸다.
보름 전과는 전혀 다른 태도.
서두르는 기색.
지나치게 정돈된 제안.
‘왜 이렇게까지…’
생각이 이어지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뚜루루루.’
“최 차장님.”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잠시 호텔 라운지에서 뵐 수 있을까요.”
잠시 말을 고른 뒤, 그가 덧붙였다.
“수도경비관할을 맡고 있는 육군소장 라크라싱어입니다.”
최차장은 수화기를 내려놓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
방 안은 조용했지만,
이제 막 다른 문이 열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