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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

by 세미한 소리

서점에 들렀다가 단순히 제목이 좋아서 책을 구입했습니다. <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 많은 이들이 공감하겠지만 좋은 어른을 만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저 역시 벌써 나이와 몸은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어른스럽지 못하게 살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 혹시나 어른다워질 수 있을까 기대를 가지고 책과 함께 집에 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책을 다시 보니 원래 제목이 <권위, AUTORITEIT>였고, 벨기에 정신분석학자 파울 페르하에허 교수가 탈권위 바람과 권위에 대한 맹목적 향수가 공존하는 시대에 새로운 권위란 무엇인지를 제시하는 책이었습니다. 제 기대와 조금은 다른 책의 내용에 당황했지만, 책 뒷면에 있는 서평이 새로운 기대감을 주었습니다.


“꼰대라는 조롱은 가장 무섭고 수치스러운 말이 되었다. 위에서 군림하는 자라는 이 말이 듣기 싫어 사람들은 곁에 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입 다물고 부재하는 길을 택했다. 그 결과 교육도 육아도 나아가 정치도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저자는 이를 권위의 문제로 다룬다. 권위가 무너진 자리를 차지한 것은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권력이다. 그렇다고 과거의 가부장적이고 수직적인 권위로 돌아갈 수는 없다.”(엄기호, 문화연구자)


2년 전 한 초등학교 교사가 자살한 일로 나라가 떠들썩한 적이 있었습니다. 추락한 교사의 권위로 모든 국민들이 슬퍼하고 한탄했습니다. 그런데 권위가 무너진 분야는 학교 교실만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이 진단하고 처방하면 그대로 약 먹고 치료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면서 스스로 납득이 될 때까지 병원 쇼핑을 다닙니다. 법원 판결도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법이 말하고 판결을 하면 끝이었죠. 그러나 지금은 바로 변호사를 찾아가서 항소를 준비합니다. 종교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권위가 무너졌습니다. 왜 무너졌을까요? 책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책이 말하는 권위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권위가 외부로부터 그 대상자에게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선생님이 자기 자신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선생님께 권위를 부여하고 자신들이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죠. 따라서 권위는 자발적이며 신뢰의 관계 속에서 일어납니다. 환자가 의사를 신뢰할 때, 의사에게 권위가 부여되고, 의사가 권위를 가질 때 환자는 자발적으로 의사의 말을 따릅니다.


이렇게 권위 그 자체는 부정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문제는 권위로 둔갑한 권력입니다. 권위는 신뢰 관계에서 형성되지만, 권력은 힘의 논리로 형성됩니다. 힘이 가장 센 사자가 정글의 왕이 되는 것처럼, 돈이 가장 많고 힘이 가장 센 사람이 권력의 왕이 됩니다. 그래서 권위는 자발적이지만 권력은 강압적이고 폭력적입니다. 문제는 기존의 권위가 가부장적이고 피라미드적이었다는 점입니다. 수직적인 구조 안에서 권위자는 점차 권력자로 변해갔습니다. 좋은 어른이 사라지고 독재자만 남은 것이죠. 뿐만 아니라 그동안 권위를 뒷받침해 왔던 기준들이, 예를 들면 남자가 여자보다, 백인이 유색인종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보다, 높은 신분이 낮은 신분보다 우월하다는 생각들이 틀렸다는 점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피라미드 아래에 있는 이들이 위에 있는 자들에게 권위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자발적인 신뢰를 보내지 않습니다. 그 결과 권위는 사라지고 권력만 남은 사회가 되었습니다. 신뢰는 사라졌고, 오직 돈과 힘만이 남았습니다. 자발성은 없고 규제와 통제만이 있습니다.


권위가 사라지고 권력만이 남았다는 책의 지적을 따른다면, 강한 교사, 강한 법처럼 다시 예전의 수직적인 권위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권위의 상실은 신뢰의 상실이 원인이었고, 그렇기에 권위의 회복도 힘을 얻을 때가 아니라 신뢰가 회복될 때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책은 피라미드식 권력을 닮은 수직적인 권위 대신에 신뢰와 자발성(자율성)을 회복한 수평적인 새로운 권위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책을 읽고 나서 <권위>라는 제목을 왜 <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라고 번역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양육과 교육이 필요하고, 양육과 교육을 위해서는 건강한 권위가 있어야 하는데, 그 권위가 무너졌기 때문에 어른이 되지 못하는 것이죠. 한 권의 책이 정답일 수는 없겠지요. 다만 권위와 권력의 구분, 신뢰와 자율성을 바탕으로 한 건강한 권위에 대한 지적은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건강한 권위가 세워져서 많은 아이들이 좋은 어른이 되는 사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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