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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미한 소리 Oct 20. 2022

신호등이 빨간불인데, 출발하라고요?

 집에서 차를 타고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왕복 4차선 도로가 나오고, 대략 500m 정도 더 가면 8차선 큰 도로를 만나는데, 이 짧은 거리에 신호등이 무려 5개가 있습니다. 학교, 주택가, 아파트 입구가 있기 때문이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해하지만, 그 길을 지날 때 평균적으로 2-3번 정도 신호에 걸릴 때마다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여기서 더 불편한 점은 급할수록 유독 신호에 더 자주 걸린다는 점입니다. 왜 그럴까요? 며칠 전에는 이보다 더 이상한 일을 겪었습니다. 평소 새벽예배에 가는 시간보다 조금 늦게 집에서 나와서 서둘러 운전을 했는데, 다행히 1번 신호등은 기다리지 않고 바로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습니다. 2번 신호등이 빨간불이라서 차를 멈췄는데, 앞을 보니 3번, 4번, 5번 신호등에 모두 빨간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순간 화나고 짜증 났습니다. 투덜거리면서 기다렸고, 얼마 지나자 2번 신호등이 초록불로 되었습니다. 부웅, 급하게 출발하자 누군가 신호등을 조작해서 길을 열어 주는 것처럼, 3번, 4번, 5번 신호등에 초록불이 연달아서 켜졌습니다. 제 눈에 비친 그 장면 거의 홍해가 갈리지는 놀라운 풍경 같았고, 심지어 초록불로 변할 때마다 팍! 팍! 팍! 팍! 효과음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모세가 애굽 군대의 추격을 피해서 갈라진 홍해를 건넜다면, 저는 시간의 추격을 피해서 초록불이 켜진 개포로를 달려서 새벽예배에 늦지 않게 도착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혼자서 조용히 기도 할 때, 문득 빨간불이 켜진 신호등 앞에서 화내고 짜증 냈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뻘쭘해졌습니다. 신호등이 무슨 죄라고 신호등에게 화를 냈을까요? 저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방해한 것도 아니고, 그저 정해진 시간에 따라 빨간불이었다가 조금 지나서 초록불이 된 것뿐인데요. 그리고 조급해하며 짜증 낸다고 해서 신호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뭐 그리 조급했을까요? 가장 창피한 점은 2번 신호등에 대기하면서 5번 신호등이 빨간불이라는 것에 좌절하며 화를 냈다는 점입니다. 그때 5번 신호등이 초록불이었다면, 오히려 제가 지나가려고 할 때는 빨간불로 바뀔 수도 있는데 말이죠. 참 어리석은 놈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저와 달리 신호등 앞에서 차분하고 여유로우십니까? 그러면 교통신호 말고, 일상생활의 신호등 앞에서는요? 생활하다 보면 일상에서 빨간불만 가득할 때가 있습니다. 집에서 빨간불, 밖에서도 빨간불, 어디를 가도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고,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될 때가 있습니다. 화나고 짜증 나고, 좌절됩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 나만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느낌이죠. 그러나 신호등이 제가 새벽예배 가려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빨간불이었던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상의 어려움들 역시 우리를 방해하고 괴롭히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이것만 기억해도 화의 온도가 조금 내려갑니다. 그리고 화가 조금 식으면 자신의 화가 어떤 모양인지 살펴볼 수 있지요. 한 번 살펴보세요. 혹시 저처럼 2번 신호등 앞에 서서 상관없는 5번 신호등의 빨간불을 보고 좌절하고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하는 걱정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고,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고, 22%는 막상 일어나도 상관없는 사소한 일이며, 4%는 우리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오직 걱정의 4%만이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걱정은 4%의 쓸모 있는 고민입니까? 아니면 제가 했던 96%의 쓸데없는 5번 신호등에 대한 고민입니까?  

 

 다 아는 뻔한 말이지만, 신호등 빨간불은 필요합니다. 빨간불이 있기에 가던 길을 멈추는 차와 사람이 있고, 누군가 멈춰주었기에 다른 차와 사람이 지나갈 수 있습니다. 나의 빨간불이 다른 이의 초록불이고, 그의 빨간불이 저의 초록불인 것이죠. 사회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특정 이슈가 어떤 분야와 사람들에게는 초록불이지만, 같은 이슈가 다른 분야와 사람들에게는 빨간불일 수 있지요. 그렇다면 화내고 실망할 것이 아니라 신호에 따라서 알맞게 행동하면 될 일입니다. 빨간불에 멈추고 초록불에 가고, 상황이 좋으면 좋으대로, 안 좋으면 안 좋은 대로 자신의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행동하면 됩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빨간불이 켜져서 무언가 하지 못한다면, 반대로 초록불이 켜져서 해야 하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아마도 그 전에는 빨간불 앞에서 기다리고 있느라 우리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이겠지요. 드디어 그것에 관심을 두어야 할 시간이 된 것이죠. 이렇게 보면 빨간불은 멈추라는 신호인 것을 넘어서 그동안 멈춰진 것을 다시 움직이라는 신호인 것이네요. 여러분의 신호등에는 어떤 불이 켜져 있습니까? 만약 빨간불이라면, 그동안 놓쳤던 부분을 돌볼 시간이 된 것입니다. 자! 빨간불에 출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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