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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미한 소리 Mar 08. 2023

잘못 주문한 상품의 택배상자가 알려준 교훈

정확하게 보아라! 다르게 보아라!

 지난 4년간 해왔던 연합회 서기직을 이번에 마쳤습니다. 그래서 연합회 관련 서류철을 정리해서 신임 서기에게 전달해야 했고, 이를 위해 수납상자를 온라인 쇼핑몰에서 주문했습니다. 박스 하나면 서류철을 다 넣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혹시 몰라서 수납상자 두 개를 묶어서 판매하는 상품으로 주문했습니다. 저는 꼼꼼하고 철저하니까요. 다음 날 출근했더니 문 앞에 택배상자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잘못되었습니다. 택배상자가 너무 작았습니다. 수납상자가 아니라 다른 택배인 줄 알았는데, 택배상자 겉면에 수납상자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수납상자 배송완료 알림도 와있었습니다. 불길한 마음으로 들어와서 택배를 풀었더니, 제가 예상했던 크기의 1/4 정도의 상자가 2개 들어 있었습니다. 현실을 부정하면서 서류철 하나를 들어서 배송 온 수납상자에 넣어 보려 시도해 봤습니다. 마치 제가 6학년 딸의 옷을 입으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죠. 



 다 제 실수였습니다. 잘못 배송 온 것도 아니고, 상품 설명을 잘못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쇼핑몰에는 상자 무게와 사이즈가 친절히 다 적혀 있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사진만 보고 대충 어림잡아서 판단한 일에 있습니다. 서류철 크기를 재보고, 상품 설명에 나온 상자크기를 확인하면 될 일을, ‘사진을 보니까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생각하고 주문한 점이 원인이었습니다. 제 자신이 너무 어이없이 여겨졌습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사진 속 수납상자는 정말 커 보였거든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제 눈대중이 그리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눈대중만 그럴까요? 제 판단이나 생각은 항상 정확할까요? 많은 경우 어림잡아서 생각하고, 제 나름으로 판단하는데, 그것은 얼마나 실제의 모습과 가까울까요? 상자의 크기를 실제보다 4배나 크게 보는 제 눈대중처럼, 제 생각과 판단도 엉터리이지 않을까 걱정되었습니다. 저를 겸손하게 만드는 잘못 배송 온 작은 수납상자 옆에서 앞으로는 너무 쉽게 판단하거나 내 마음대로만 생각하지 말아야겠다고 겸손히 다짐해 봤습니다. 


 그러나 계속 앉아서 다짐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날 점심에 신임 서기와 점심식사를 하고 서류철을 전달해야 했거든요. 남은 시간 안에 온라인으로 다시 주문할 수도 없고, 차로 마트에 가서 수납상자를 구입한 다음에 와서 정리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심지어 주변에 수납상자를 파는 가게도 없었습니다. 그 순간 덩그러니 옆에 치워져 있던 택배상자가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여보게, 나를 써보게!” 


 그러고 보니 택배상자가 퍽 쓸 만한 수납상자처럼 보였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서류철을 가지고 와서 택배상자에 넣어보니, 다행히 잘 들어가서 서류철을 다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 산 수납상자에는 도장, 문구류처럼 작은 물건들은 담았습니다. 아! 꼼꼼하고 철저한 제가 수납상자를 두 개 주문했었네요. 그래서 남은 수납상자는 사무실에 있던 보드게임을 넣어 두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신임 서기에게 서류철을 무사히 전달했습니다. 진이 빠져서 혼자 사무실에 앉아 있었는데, 제가 고양이처럼 행동한 것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집에 같이 사는 고양이들도 택배가 오면, 택배 내용은 1도 관심 없고, 택배상자 안에 들어갔다 나갔다 하면서 한참을 가지고 놀거든요. 제가 꼭 고양이처럼 행동한 거죠. 그래도 한 가지 배웠습니다. 같은 물건도 다르게 보면 새로운 물건이 된다는 점입니다. 물건을 담는 택배상자를 다르게 보면 고양이 장난감이 되기도 하고, 수납상자가 되는 것처럼 말이죠. 


 지금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무엇이 보이십니까? 눈대중으로 대충 보고 판단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요? 그리 화를 낼 일이 아닌데, 화를 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정도로 걱정하고 절망할 필요 없는 일인데, 미리 좌절하고 포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을 과소평가하거나 반대로 과대하게 여겨서 일을 망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함께 하는 다른 이들을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지는 않나요?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보세요. 오래된 숨을 내뱉으면서 낡은 생각을 버리고, 신선한 숨을 들이마시면서 새로운 마음과 생각을 얻습니다. 그리고 눈을 떠서는 이전과 다르게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죠. 다른 각도와 새로운 시선으로 보면, 전에 보지 못했던 점들이 보입니다. 절망 가운데 희망을 발견할 수 있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새로운 길과 기쁨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정확하게 보고, 다르게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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