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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미한 소리 Apr 07. 2023

밥상에 올라온 깍두기는 언제나 제 역할을 다한다

깍두기 사람도 그렇다

 라디오에서 깍두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추억의 깍두기부터 어설프게 만들었지만 의외로 맛있었던 초보자들의 깍두기까지, 여러 사연이 담긴 깍두기 이야기들이 소개되었습니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저는 학창 시절 어머니가 도시락 통에 싸주셨던 깍두기가 떠올랐습니다. 여러분은 깍두기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대부분 추억이 담긴 깍두기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겠지요. 그런데 깍두기가 꼭 음식만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렸을 적 놀이를 할 때에는 늘 깍두기가 있었습니다. 놀이의 정식 인원이 되거나, 놀이의 한 역할을 맡기에는 조금 부족한 이들을 깍두기라고 부르면서 함께 놀았습니다. 주로 누나와 형을 따라온 어린 동생들이나, 놀이 실력이 또래 친구들에 비해 모자라는 친구들이 깍두기가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또래보다 놀이를 너무 잘해도 깍두기가 되었습니다. 라디오에 사연을 보낸 어느 청취자는 또래에 비해 너무 커서 말뚝 박기를 할 때면 늘 깍두기가 되어 벽에 서서 가위 바위 보 하는 역할만 했다고 합니다. 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동네 놀이터에서 깍두기로 누나와 형들과 함께 놀았던 그 시절, 학교운동장에서 여러 깍두기들과 함께 다방구, 오징어, 공놀이를 하던 그 시절이 말이죠.


 모든 놀이에 슬그머니 들어가서 함께 놀 수 있는 만능 패스 깍두기! 그때는 그리 특별할 것 없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놀이 법칙이었는데, 오늘날 돌이켜보니 왜 이리 정겹고 아련한 마음이 들까요? 아마도 오늘의 현실이 그것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학교운동장과 동네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자체가 귀하지만, 학교 교실이나 학원 그리고 또래가 모여 있는 곳을 들여다보아도 깍두기를 보기 힘듭니다. 대신에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은 어렵지 않게 마주치게 됩니다. 예전의 깍두기들이 오늘의 왕따가 되어 버린 것일까요? 


 씁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의 책임을 아이들에게 물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회를 이러한 모습으로 변화시킨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자신들이 사는 아파트 친구들과만 노는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아이들이 공부 잘하는 친구들과만 어울리려는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부모들이 좋은 직업을 가진 친구들과 어울리려는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반대로 아이들이 공부 못하는 친구들과 놀지 못하는 것은요?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 형편의 친구들과 놀지 않으려는 것은요? 동네 놀이터에서 학교 운동장에서 놀지 않는 것은요? 생각해 보면 깍두기를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 것은 요즘 아이들이 아니라, 요즘 어른들입니다.  


 “밥상에 올라온 깍두기는 언제나 제 역할을 다합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이 말이 제 마음을 쿵 하고 쳤습니다. 실제 밥상에서 깍두기는 무언가 부족하고 제 역할을 못하는 깍두기가 아닙니다. 밥상 위의 깍두기는 2등 김치 따위가 아닙니다. 자신의 맛을 내는 그대로 충분한 음식입니다. 고기반찬, 장조림, 나물 등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훌륭한 음식입니다. 오히려 라면에는 깍두기가 최고이지요. 


 사회라는 밥상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세상의 모든 깍두기와 왕따는 2등 시민이거나 무언가 부족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밥상 위의 깍두기가 그 자체로 충분한 음식인 것처럼, 세상 모든 깍두기들 역시 이미 충분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서툴고 부족할 수 있겠지요. 그래도 함께 놀기에는 충분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깍두기가 맛있게 익어가듯이, 부족한 사람도 맛있게 익어갈 것입니다. 예전에 코 흘리며 누나와 형을 쫓아다녔던 수많은 깍두기들이 이제 어른이 되어서 각자의 삶을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부족하고 모자라서 지치고 외로운 세상의 수많은 깍두기들의 삶이 조금 더 맛있어 지길 응원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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