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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미한 소리 Jul 28. 2023

오징어서약

 여행을 가면 동네서점에 들러서 그 지역 이야기와 정서가 담긴 책이나 그 지역 출신 작가의 책을 구입하곤 하는데, 그렇게 우연히 만난 책들은 늘 나름의 즐거움을 선물했습니다. sns 맛 집처럼 사진 찍어서 자랑하고 싶은 장소와 맛이라기보다는, 남들에겐 숨기고 나만 가고 싶은 소박하고 정겨운 노포의 맛이라고 할까요? 이번 여름휴가에서는 강원도 고성의 작은 동네서점에 들러서 <동쪽의 밥상>이라는 책을 샀습니다. 속초에서 줄곧 산 기자 출신 저자가 영동 지역의 향토음식을 매개로 이곳 사람들의 삶과 음식문화를 다룬 책입니다. 이 책 역시 선물 같은 이야기를 주었고, 그중 하나를 나누려고 합니다.  


 “옛날 중국 강동 사람들은 오징어 먹물로 증서를 써주고 남에게 재물을 꿔 가곤 했는데, 시일이 오래가면 그 먹물이 다 지워져버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하여 거짓서약을 ‘오징어서약’이라고 했다는 것이다.”(엄경선, <동쪽의 밥상> p162)


 글을 읽고, 오징어 먹물을 얻기 위해서 애쓰는 장면, 오징어 먹물로 증서를 쓸 때 들킬까 식은땀을 흘리는 장면, 글씨가 다 사라진 빈 증서를 보면서 화를 내는 장면들을 상상하면서 씩 웃었습니다. 물론 실제로 강동 사람들이 오징어먹물로 증서를 썼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강동 사람들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서약하며 남들을 속이는 사람이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니까요. 나아가 거짓서약이나 사기가 아니라도 보통 사람들이 하는 일반적인 약속과 다짐도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지고 사라질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만약 오징어서약을 이런 의미로 이해한다면, 저도 오징어서약을 참 많이 했습니다. 부모님과 아내에게, 그리고 자녀들과 주변사람들에게 한 약속들도 증서를 쓸 때에만 진하게 보이는 오징어먹물처럼, 그저 말할 때에만 반짝이었고, 그중 대다수가 오징어먹물처럼 증발해서 없어졌기 때문이죠. 남들에게 한 약속만이 아닙니다. 저 자신에게 한 다짐이나 약속도 오징어먹물이 증발하고 남은 빈 종이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약속과 다짐은 어떠합니까? 오징어서약입니까? 


 오징어서약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노력한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약해지고 흐려져 오징어먹물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다만 오징어서약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오징어서약을 남발하고도 제게 무엇이 남았을까요? 부모님이 여전히 제 앞에 서 계십니다. 무엇하나 제대로 지킨 적이 없지만 그래도 부모님은 여전히 저를 믿어주십니다. 잘해준 일도 거의 없지만 여전히 아내와 자녀들이 제 앞에 서 있습니다. 왜 여전히 남아 있는 걸까요? 오징어먹물이 사라지고 빈 종이만 덩그러니 남듯이, 그럴듯하고 반듯한 약속과 말이 사라지면 빈 종이 같은 제 자신만 남는데, 가족들이 보고 있던 것이 그럴듯한 말이 아니라 저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 약속이나 말이 아니라 저 자체를 바라보기 때문에, 빈 종이 같은 저라도 견뎌 주고, 있는 그대로 품어 주는 것이죠. 그렇게 곁에 남아주는 그들이 참 고맙습니다. 그러니 저도 함께 하는 이들의 빈 종이를 인정하고 옆에 서 있으려 합니다. 


 그리고 오징어서약은 그만해야겠습니다. 모든 약속을 지켜 언행일치를 이루겠다는 허언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오징어먹물로 나 자신을 치장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하지도 잘나지도 않은 빈 종이 같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솔직하게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평범하고 잘나지 않아도 곁에 서 있는 이들이 있고, 나 역시 그들 곁에 서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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