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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미한 소리 Aug 26. 2023

기아팬이 한화팬에게 배우다; 희망을 넘어 약속에 이르자

존 버거, 모든 것을 소중히하라

절망은 배신당했다고 느꼈을 때 뒤따르는 감정이다. 희망(약속이라는 말에는 이르지 못한)이 희망과 버성겨 다른 희망을 무너뜨리고 또 스스로 무너지기도 한다. 영혼에서 그런 희망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절망이 대신 채운다.
(존 버거, 모든 것을 소중히하라, p104, 열화당) 

 

 희망이 무너진 자리에 절망이 생긴다는 존 버거(미술비평가, 사진이론가)의 글에 머리를 끄덕입니다. 프로야구를 처음 접했을 때 다른 가족은 LG트윈스팬이었지만, 저는 해태를 응원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선동열, 이종범, 한대화, 이순철 등 최고의 선수들이 가득했고, 우승을 밥 먹듯이 하던 최강팀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야구시즌이 시작되면 명문팀이니까 올해에는 다시 우승할 거라는 희망을 갖지만, 시즌이 끝나면 희망은 좌절되고 절망만이 남습니다. 존 버거의 말처럼 희망이 배신당하고 절망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이죠. 그래서 요즘은 기아(해태)가 가을야구를 하고 우승할 것이라는 희망을 아예 안 갖습니다. 그랬더니 절망할 일은 없어졌지만, 대신 야구경기 자체도 안 보게 되더라고요. 매번 절망하면서 좋아하는 야구경기를 봐야 하는지,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 좋아하는 야구경기 자체를 보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이 더 나은지 모르겠습니다. 


 뭘 야구경기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하느냐고 할 수 있지만, 희망과 절망의 자리싸움은 야구경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에서도 우리가 희망하는 일들은 많은 확률로 좌절되고, 그 좌절로 인하여 우리 마음 안에 절망이 생깁니다. 그러면 희망을 다 버리고 포기해야 하나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존 버거는 위의 글에서 희망을 약속이라는 말에 이르지 못한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이를 정리하면 희망이 약속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존 버거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감히 기아팬은 범접할 수 없는 한화팬이 떠올랐습니다. 어떻게 매년 꼴찌 하는 팀을 저렇게 열심히 응원할 수 있을까요? 한화 출신 레전드 타자 김태균 선수도 궁금했는지, 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육성응원’에 대해 직접 물어봤습니다. ‘육성응원’은 8회에 한화팬들이 하는 응원인데, 팀이 이기고 있든지 지고 있든지 마이크와 스피커를 끄고 큰 목소리로만 하는 응원입니다. 김태균 선수가 팀이 지고 있을 때,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열심히 ‘육성응원’을 하느냐고 물어봤더니, 한 팬이 “8회가 되면 그냥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거 같아요. 8회다! 그냥 우리의 약속인 것처럼. 지고 있던 이기고 있던 선수들한테 우리 여기 있어, 너희들은 그냥 힘내! 그냥 너희들 할 거 해”라는 마음으로 육성응원을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김태균 선수는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화팬들은 어떻게 희망을 넘어 약속의 자리까지 갔을까요? 먼저 우승이라는 멀리 있는 희망 대신에 매일 하는 경기에서의 승리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희망이라도 현실에서 시작하고, 현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현실에서 시작한 실현 가능한 희망, 이것이 약속입니다. 그러나 희망이 약속이 되어도 배신은 일어납니다. 우승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해서 경기에서 매번 지는 일이 괜찮을 리 없습니다. 그러면 한화팬들은 이 아픔을 무엇으로 치유할까요? 여전히 현실에서부터 저 멀리 떨어진 희망과 약속을 어떻게 따라잡을까요? 믿음입니다. 희망이 배신당해서 절망이 되고,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서 분노가 될 때, 그럼에도 여전히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안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한화팬들이 멋진 팬들인 것은 여전히 자신의 팀과 선수를 믿어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절망시키는 일이 있습니까? 그것을 뒤집어 보세요. 한때 여러분을 흥분시키고 설레게 했던 희망이 있습니다. 비록 좌절되고 상처받았지만, 다시 그 희망을 품어보세요. 대신 이번에는 현실과 믿음의 날개를 달아주세요. 그러면 희망은 약속이 되고, 약속은 믿음이 되어 여러분을 이끌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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