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미한 소리 Sep 07. 2023

우산이 2개나 있지만 쓰지 않는 초2에게 배우다

 비가 조금씩 내리던 며칠 전 오전에 아내가 밖에 나갔는데, 앞에 초등학교 2학년 정도로 보이는 한 학생이 비를 맞으면서 걸어가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우산을 씌워 주려고 빠르게 걸었는데, 그 학생이 양손에 우산을 들고 있었습니다. 오른손에는 나무 손잡이가 있는 멋진 장우산을 들었고, 왼 손에는 작게 접히는 3단 우산을 들고 있었습니다. 슬며시 우산을 씌워 주면서, 우산이 2개나 있는데 왜 쓰지 않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학생은 “이 장우산은 학교 가면서 쓰려고 가지고 가는 우산이고, 다른 우산은 예비용으로 학교에 두려고 가지고 가는 우산이에요. 그런데 양손에 우산을 들고 있어서, 우산을 펼 손이 없네요. 그래서 그냥 비를 맞고 가는데, 괜찮아요.” “비 맞으면 젖으니까, 우산을 펴서 쓰고 가면 어때?” “아니에요. 그냥 이렇게 갈래요. 괜찮아요.” 그리고 학생은 아내에게 꾸벅 인사하고 씩씩하게 학교로 걸어갔습니다.

 

 아내에게 이야기를 듣고 둘이서 한참 웃었습니다. 그 학생이 왜 그랬을지 추측하면서 수다를 떠는데, 문득 저도 그 학생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 우리를 젖게 만드는 것이 아니니까요. 마음에 내리는 장마, 생각에 내리는 안개비, 인간관계에 내리는 폭우, 그리고 예고 없이 인생에 내리는 소나기처럼 온갖 비가 우리에게 내립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이 비를 막을 우산이 있습니다. 믿음, 용기, 희망, 사랑, 열정, 양심, 측은지심 같은 영혼의 우산이 비를 막아줍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학생처럼 우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필요한 순간에 쓰지 않는 경우가 많지요. 제가 그렇습니다. 사랑이 필요한 순간에 사랑의 우산을 쓰지 않고 그저 화를 내고, 용기가 필요한 순간에 용기의 우산을 그저 손에 들고 불안해하며, 열정이 필요한 순간에도 양손에 우산을 들기만 하고 무기력해합니다. 우산을 쓰면 되는데, 그냥 손에 들고만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손에 들고 있는 우산으로 내리는 비를 막고 계십니까? 아니면 손에 우산을 들고도 비를 맞고 계십니까?


 물론 우산 없이 비를 맞는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멋진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아내는 그 학생이 그랬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우습게 보였지만, 나중에는 자유롭고 당당하고 멋져 보였다고 합니다. 우산이 2개나 있으면서도 우산을 쓰지 않는 모습 속에서 무엇이 멋져 보였을까요? 우산이 2개나 있었기 때문일까요? 있는 자의 여유? 우산이 없어서 비를 맞는 것보다는 덜 처량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산의 유무가 다는 아닙니다. 더 결정적인 그 학생의 멋짐은 스스로 선택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나에게 우산이 있지만 쓰지 않겠다. 2개나 있지만 그래도 싫다. 비를 조금 맞겠지만 괜찮다. 왜냐고? 가끔 이유 없이 그냥 비를 맞고 싶은 날도 있으니까! 나는 하루를 살면서 얼마만큼 스스로 선택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정해진 대로, 남들 하는 대로, 사회가 말하는 가치를 내 가치라고 착각하고, 남들의 기대를 내 바람이라고 오해하면서 작은 것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오늘 하루 무엇을 스스로 선택하셨습니까? 


 왜 같은 학생의 행동을 두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느냐고요? 그래서 그 학생이 잘한 거냐고요? 못한 거냐고요? 저야 잘 모르죠. 그 학생의 마음과 의도를 모르니까요. 그리고 몰라도 되고요. 그러나 제 자신의 마음과 의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가진 잠재력과 능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한심하게 살고 있는지 아닌지 나 자신은 알아야겠지요. 내가 하는 선택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내 인생의 주체가 나 자신인지 점검해야겠지요. 그 학생이 우스운지 멋진지 정하는 일이 중한 일이 아니라, 내가 우습게 살고 있는지, 멋지게 살고 있는지가 중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우습게 살고 계십니까? 멋지게 살고 계십니까? 멋지게 살아 봅시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아팬이 한화팬에게 배우다; 희망을 넘어 약속에 이르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