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무모한 희망, 사라져가는 동물들과 나누는 사순절 이야기>
사순절 기간 동안 사라져 가는 동물들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있는데, 이번 주에는 거처가 없는 이들입니다. 먼저 만나 볼 친구는 제왕나비입니다. 제왕나비의 날개는 약 8~10cm 정도입니다. 사람 기준으로 보거나, 새와 비교하면 작아 보이지만, 나비 중에서는 가장 큰 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그 날개로 북아메리카(캐나다)에서 중남미(멕시코)까지 약 4,000km 거리를 비행한다는 점이죠. 캐나다에 사는 제왕나비는 추운 겨울이 되면 따뜻한 멕시코로 이동하고, 봄에 짝짓기 하고 알을 낳은 후, 아기 나비들과 함께 다시 캐나다로 돌아옵니다. 참 대단한 일입니다. 왕복 8,000km를 이동하기 위해서 8cm 날개는 도대체 몇 번을 움직여야 할까요? 대단한 생명력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력도 이겨내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쓸모”입니다. 제왕나비는 박주가리 잎에 알을 낳고, 알에서 나온 애벌레는 박주가리 잎을 먹고 자라야 하는데, 박주가리를 쓸모없는 잡초로 여긴 이들이 농약을 뿌려서 박주가리를 다 죽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4,000km를 날아왔지만, 알을 낳고 생명을 이어갈 거처가 사라졌습니다.
제왕나비가 쓸모가 없어서 거처를 빼앗겼다면, 아메리칸테이퍼는 반대로 쓸모가 있어서 거처를 빼앗겼습니다. 우리에게 생소한 아메리칸테이퍼는 길고 큰 코를 지닌 초식성 동물로,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파라과이 등지에서 서식하는데, 브라질의 세라도 초원에서도 서식합니다. 세라도라는 이름은 ‘폐쇄된'이라는 의미로 세라도 땅이 농업에 쓸모없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이처럼 사람에게 쓸모가 없는 세라도 초원은 그래서 오히려 야생 식물과 동물들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에 소고기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고, 소가 먹는 옥수수와 콩도 많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리고 쓸모없다고 여겼던 세라도에서 옥수수와 콩이 잘 자란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죠. 이에 세라도는 빠르게 개간되면서 기업식 농업이 들어왔고, 그만큼 빠르게 아메리칸테이퍼를 비롯한 야생동물들은 거처를 빼앗겼습니다.
쓸모가 있어도, 없어도 거처를 빼앗기네요. 그리고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보다 쓸모 있어진 A.I가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기도 하고, 젠트리피케이션처럼 갑자기 쓸모가 생겨서 쫓겨나는 이들도 있습니다. 나비처럼 열심히 움직여서 살지만, 거처를 빼앗기는 이들이 주변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바다에서도 일어납니다. 북극곰의 집은 북극의 빙하인데, 이상기후와 높아진 온도로 인하여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집이 눈앞에서 녹아 사라지는 것이죠. 만약 우리의 집이 갑자기 녹아서 사라진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화가 난다? 황당하다? 이 말들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이겠지요. 같은 심정을 북방긴수염고래가 느끼고 있습니다. 어부들이 바닷가재와 게 등을 잡기 위해서 바다에 던진 덫은 바닥에 가라앉아 있고, 바다 위에는 위치를 알려주는 부표가 떠 있는데, 이 둘이 밧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밧줄이 문제입니다. 자신의 집에 갑자기 밧줄이 생긴 사실을 알 수 없는 긴수염고래가 자유롭게 수영하다가 이 밧줄에 걸립니다. 이렇게 긴수염고래는 매년 50마리 정도가 밧줄에 걸려서 다치고 죽습니다. 안전한 자신의 거처를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그네를 걱정하시면서, 사람들에게 나그네를 돌보라고 권합니다. 농사를 지을 때에도 나그네를 위해서 떨어진 곡식과 열매는 줍지 말고 남겨두라고 합니다. 예배, 절기, 축제를 할 때에도 나그네를 초대해서 함께 먹고 마시라고 합니다. 나그네는 누구입니까? 바로 거처가 없는 이들입니다. 사순절 제3주간 이 거처가 없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 모든 생명이 터를 잡고 살 수 있는 넉넉하고 풍요로운 세상이지만, 왜인지 거처가 없는 이들이 생겨납니다. 쫓겨나는 나그네가 있습니다. 쓸모가 아니라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가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