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마지막이 될지 모르니까.
작년부터 일을 할 때마다 농담 반 진담 반 해온 말이다. 감사하게도 내 상황에 맞춰진 재택근무 기반의 업무를 하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직장이 나의 사정을 봐주기란 어려울 테니까. 풀타임 인원이 필요하다 하면 언제든지 떠나야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언제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고.
그런데 작년 말쯤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올해 들어 자꾸 눈덩이 굴리듯 커지는 것이다. 지난주 다녀온 제주도 학회는 막상 가보니 생애 가장 큰 발표장이라 얼떨떨하게 발표를 했고, 오늘 회의에선 대뜸 다음 6개월 간 2번의 추가 발표가 확정됐다.
인생이 이렇게 아이러니하다. 마지막을 생각하고서야 쏟아지는 기회들. 감사하기도 하고, 그만큼 고민도 많이 된다. 이왕 주어진 기회에 뭔가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오면 좋겠지만 그런 사심이 생기면 오히려 부담이 더 커질까 무섭기도 하다. 한껏 게으른 삶이 허락되기 전에 마지막 테스트 같은 걸까.
이번 제주도 출장의 가장 특이점은 차량 렌트를 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 않아놓고 하지 않은 것이 처음이라는 사실조차 몰랐을 만큼 렌트는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차를 타고 돌아다닐 만한 여유가 없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베짱이는 역시나 놀구멍을 찾아 헤매었고...ㅎ 기어이 세 시간 정도 행사장을 탈출해 택시를 타고 놀러를 갔더랬다. 차가 없으니 택시를 타고 식당에 가고, 거기서 3킬로쯤 떨어진 독립서점을 걸어서 가고, 또 1킬로쯤 떨어진 곳을 걸어가 커피를 마시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처음 걸어본 제주는 차로만 다닐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언덕을 타는 것에 이어 지도가 알려주는 길은 도저히 길이라 생각할 수 없는 논두렁길(?)에 가까웠고, 그렇게 가는 곳곳에서 '밭'을 마주했다. 도시에서는 비닐하우스가 아니면 쉽게 볼 수 없는 브로콜리, 비트, 콜라비, 당근 등등 종류도 다양한 밭이 구석구석 연못 마냥 - 진짜 연못처럼 생겼다 - 있었고, 어쩌다 돌아보면 어디에서도 눈 덮인 웅장한 한라산이 너무도 잘 보였다. 걸어 걸어 들른 독립서점에는 거구 아저씨가 드르륵드르륵 이정표를 만들고 계셨는데, 서점주인이 썼다는 섬세한 책을 사고 보니 그 거구 아저씨가 서점 주인이라 또 한 번 놀랐다. 심지어 그 거구 아저씨는 문학동네 편집장 출신이었다는 점도.
가보지 못한 곳을 가고, 하지 못한 경험을 하고. 글조차 쓰지 않으면 너무도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그렇게 무료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그렇게 다시 글을 쓰고, 떠나고, 경험하고. 어느새 한껏 게을러져 버린 내가 꿈꾸는 삶의 모습은 아직은 고이 접어두어야 할 때 인가보다. 그날이 오면 나 역시 거구 아저씨 같은 삶을 살 수 있겠지. 지금은 일단,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