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라는 법은 없어서

by Decenter

혼자가 힘들면, 온 우주의 도움을 받는다.


작년, 반응이 좋았던 발표가 있었다. 어찌어찌 리서치를 하다 운 좋게 잘 된 것이었지만 그래도 무언가 오리지널리티를 냈다는 생각에 한동안은 꽤 뿌듯해했더랬다.


그러나 좋기만 한 게 어디 있을까. 다 나쁜 것도 없지만 다 좋은 것도 없다는 법칙은 여지가 없다, 그 성과가 다시 부담이 되어 옥죄어 오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 우리 빅마우스 소장님은 어딜 가나 그 과거의 일을,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감추지 않으셨다.


새로운 발표 일정이 잡히고, 나는 끙끙 앓기 시작했다. 최악을 상상하고 받아들이자고, 발표 한 번쯤 망쳐봐야 바보소리밖에 더 듣겠냐며 반쯤 포기와 해탈의 경지에 이른 척했지만 이미 걱정이 육체를 지배하여 생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툭치면 바사삭 부서질 것 같은 시래기의 현신 마냥, 숨만 쉬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중간 보고회를 하루 앞두고 뭐라도 갈무리는 해야 해서 꾸역꾸역 컴퓨터 앞에 앉은 참이었다. 오랜만에 집에 들른 언니와, 신랑이 있는 거실에서 나는 거의 한탄을 섞어 그간의 여정을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내 생각을 다른 사람한테 설득시키는 건 좀 귀찮은데? 의 표정이 역력한 신랑이 뭐 이런 거 아니냐며 툭 한마디 던졌더니, 뭔갈 새로 만드는 것은 귀찮지만 논리력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언니입에서 거짓말 같은 스토리텔링이 줄줄 이루어졌다. 그렇게 원래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지만 도저히 선명해지지 않았던 나의 아이디어가 드디어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단 20분 남짓한 시간이었다. 그때 시간이 밤 10시. 툭 던져놓고선 홀린듯한 나를 보며 다시 나에게 무관심해진 둘을 두고 나는 미친 듯이 발표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난 몇 달. 한 시간도 앉아있기 고통스러운 나날들이었건만 마지막으로 저장 버튼을 누르고 보니 새벽 세시가 훌쩍 지나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몰입해서 신나게 일해본 적이 언제였을까. 기억도 나지 않는 시간이 흐르고 흘러 모처럼 맞이한 순간. 다음날 회의를 위해 네 시간 뒤에 알람을 맞추고 잤는데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번쩍 떠졌다. 기차를 타고 회의를 하러 가는 길에 피곤조차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도 놀랍기 그지없다. 만약 언니가 오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내가 그렇게 주절거리지 않았더라면. 그걸 듣고 한 마디씩 보태주지 않았더라면. 도살장 끌려가는 소처럼 회의장에 가서 죽상을 했을 나를 상상하니 아찔할 따름이다. 오늘 나의 발표는 적당한 논란을 만들었고 그 덕에 치열한 논쟁이 일어났으며 그렇게 수정 방향이 정해졌다. 수정하는 일쯤이야. 방향이 잡히고 나니 일사천리다.


모든 일엔 끝이 있다. 만약 결국 정리를 못해냈어도 끝이 있을 일이었지만 또 이렇게, 적시에 나타난 적절한 도움을 받아 한 고비를 넘긴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말이 그저 딱, 오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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