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의 글은 늘 울음이 그득하다.
그래서 글 쓰는 게 너무 필요하지만, 한편 글을 쓰는 것이 두렵다. 매일 또 같은 이야기, 그 자리에서 뱅뱅 맴돌고만 있는 나의 제자리가 온데 다 까발려질 것만 같아서. 그렇지만, 회피에는 한계가 있다. 두렵지만 다시 또 돌아온다.
내가 감정의 늪에서 허덕거릴 때, 그것을 보기 힘들어하는 타인의 시선을 이해한다. 반대로, 나였어도 힘들어할 테니까. 내 몸 하나, 내 감정 하나 추스리기도 어려운데,라는 말로 회피할지 모르니까. 내가 제일 힘들어라는 외침은 어떻게 보면 참 이기적이다. 결국, 나 하나밖에 못 챙긴다고, 내 세상에는 나 하나밖에 없다고 외치는 꼴이니까. 고작 자신도 다독일 여력이 없는 이의 마지막 외침이라 한들 타인에게는 이기적인 꼴로 밖에 안된다.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를 이해할 수 있냐고 물었다. 자식을 둘이나 낳고 살아온 자신의 가정에 쪽지 한 장 남겨두고 사라져 버린 남자. 이유조차 알리지 않은 그는 미움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 미움을 포함한 타인의 그 어떤 시선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도 다가온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들의 호의도, 경멸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 자신의 세계에서 허덕이느냐, 그 안에 머물기만을 고집하느냐의 차이다. 고립되기는 매한가지지만 그 자신이 느끼는 것은 천지 차이이지 싶다. 전자가 휘둘리는 꼴이라면 후자는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니까.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 화를 내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은 무시해 버리면 그만인데, 무시할 수 없는 위치나 관계에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해할 수 없음에 다가가는 것이 순수한 호기심일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음과 얼마나 어우러질 수 있을까. 끝끝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와 동화되거나 혹은 동화시켜야만 끝나는 건 아닐까. 동화되어 줄 수 없으면서 동화되어 주기를 바란다.
햇살이, 뜨겁게 내려쬔다. 주근깨도, 피부색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내려쬐는 햇볕아래 뒹굴고 싶다. 24시간쯤 취해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