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러일으키다(어떤 마음, 행동, 상태를 일어나게 하다)
"엄마. 저요. 할 말 있어요."
중2아들 표정이 오묘하다. 할 말 있다고 하면 가슴부터 두근거린다. 기말고사 성적 나왔나? 시험을 망친 건가?
시험이 끝나고 오면 아깝게 계산 실수를 했네. 단위를 안 썼네. 아는 문제도 틀렸네 등등 틀린 문제들의 수많은 이유들을 찾더니 이번 시험은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그래서 더 가슴이 요동쳤다.
"그래. 할 말이 뭐야?"
"저요. 이번에 국어 수행 만점 맞았어요. 글쓰기 수행평가였는데 고칠 때가 없어서 perfect 준 사람이 2학년 전학생 중 딱 한 명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저래요." 아이 얼굴이 환해지면서 미소가 보인다. 그런 아이 얼굴을 보니 나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와. 우리 아들 대단하다. 진짜? 뭐에 대해서 썼어? 뭐라고 썼을지 궁금하다. 엄마가 볼 수는 없어?"
속사포 질문이 시작된다.
"저번에 엄마한테 물어봤었잖아요. 올해 꼭 바라고 이루고 싶은 거요. 그거에 대해서 썼어요."
"그래. 궁금하다. 그래서 그게 뭐였는데"
"화이트크리스마스 되는 거 이번 기말고사 성적 목표 달성하는 거요."
"제가 이루고 싶은 거를 다 이룬 것 같아요. 크리스마스 때 눈이 왔고, 성적도 제가 목표한 건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와. 대단하다. 네가 바라는 게 다 이루어져서 엄마도 기분 좋다. 초등 때부터 꾸준히 글을 쓰더니 역시 이제 빛을 보는구나"
"엄마가 작가님이니 제가 글을 잘 쓰죠. 그런대요 엄마. 제가 엄마보다 글 쓴 경력이 오래돼요. 저는 초등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쓰고 있잖아요. 꾸준히 쓰다 보니 이제 글 쓰는 게 어렵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아들이 제법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래. 뭐든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해. 그래서 엄마도 꾸준히 써보려고 일주일에 한편씩 발행하는 거야."
"그나저나 이번주는 뭘 쓴다니? 엄마는 아직도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워"
큰아이 초3 선생님은 일주일에 글쓰기 한편씩을 과제로 내주셨다. 아이 숙제가 내 숙제처럼 느껴졌다. 다른 부모들 같으면 당장 논술학원도 알아보고 했을 텐데 외벌이인 우리 형편상 논술학원을 알아보는 건 무리였다. 엄마인 내가 봐주면 되겠다 싶지만 지금까지 그 흔한 육아일기 한 장 안 썼던 나였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편씩은 써야 하니 우린 주말만 되면 둘이 앉아 고심에 빠졌다.(몇 주 동안은 주제 목록들을 보며 쉬운 주제들을 골라 썼다.) 큰아이는 오히려 나보다 어른스러웠다. 자리에 앉아 자기 생각을 줄줄 써 내려갔다. 아이가 글을 완성할 때까지는 관여하지 않았다. 글을 완성 후 가져오면 이문장은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이 조사는 빼면 어떨까. 문장이 조금 길어서 읽기가 힘드니 두문장으로 나눠보는 건 어떨까 조금씩 피드백을 해주었다. 아이는 점점 좋아졌다. 길어서 지루했던 문장들은 간결하면서도 담백한 문장으로 바뀌었고 제법 그럴싸한 표현들도 차츰 늘어갔다. 몇 번 피드백 후엔 아이 글을 그냥 확인만 했다. 주 1회 1년 동안 꾸준히 글을 쓰니 아이 글은 제법 읽어 줄 만한 실력이 되었다.
4학년 선생님은 글쓰기 과제를 내주지 않으셨다. 상담 때 선생님께 여쭤보니 사춘기를 이제 막 시작한 아이들도 있고 고학년이 되니 과제를 안 해오는 애들도 많아서 글쓰기 과제는 안 내주신다고 하셨다. 작년동안 아이 글쓰기 성장 능력을 알기에 좀 아쉬운 부분이었다. 글쓰기는 멈출 수 없었다. 아이랑 이야기해서 주 1회 글은 계속 쓰기로 했다. 다만 주제는 자유다. 독서감상문을 써도 좋고 영화감상문도 좋고 주제를 본인이 정해서 쓰는 거라고 하니 아이는 오히려 좋아했다.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지금은 내가 확인도 하지 않는다. 다만 노트북 파일 폴더에 차곡차곡 쌓일 뿐이다.
둘째 아이 초3 선생님 역시 일주일에 글쓰기 한편씩을 과제로 내주셨다. 큰아이 때 경험 해봐서인지 그 무게감은 달랐다. 피드백 조금 해주면 금방 좋아지겠지. 그러나 역시 둘째는 달랐다. 글쓰기를 어려워하고 피드백해주는 걸 싫어했다. 글쓰기 과제를 확인하는 것조차 싫어했다. 몇 번만 글을 보여주더니 그 후론 자기가 알아서 쓰겠다며 확인조차 받지 않았다. 아이마다 성향이 다르니 아이의 의견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큰아이 3학년 글쓰기 노트를 찾았다.
"이거 오빠가 3학년 때 쓰던 건데 너 한번 읽어볼래. 오빠한테 허락은 받았거든."
"어. 이거 오빠가 쓰던 거야? 이게 아직도 있어."
둘째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쳐다본다. 말없이 소파에 가서 한참을 읽었다.
"오빠 생각보다 잘 썼네." 오빠를 질투의 대상으로 여기는 아이한테는 엄청난 칭찬이다.
"어때. 오빠도 3학년부터 꾸준히 썼어. 너도 꾸준히 쓰면 오빠보다 더 잘 쓸 수 있어."
둘째는 그 후로 주말 8시면 혼자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엄마. 나 지금까지 글쓰기 과제 내면 선생님이 별 1개씩 주셨는데, 이번에 2개 받았어요."
"와. 대단해. 대단해. 어떤 주제였어? 엄마 보여주면 안 돼?"
"엄마. 지난번에 읽어드렸잖아요. 바닷속에서 마주친 어마어마한 일이요."
맞다. 그날은 처음으로 아이가 쓴 글을 가져와서 읽어주었다. 본인도 만족스러웠나 보다. 상상을 하며 쓴 글이었는데 그럴싸한 이야기 한편을 완성해서 쓴 글이었다.
나비 효과는 나비의 작은 날갯짓처럼 미세한 변화, 작은 차이, 사소한 사건이 추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로 이어지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남편의 '작가님'이라는 호칭이 머쓱하다가도 기분 좋았다. 남편은 큰아이 수행 만점 맞은 것, 둘째가 별 2개 받은 것 모두 작가님 덕분이라며 날 치켜세웠다. '그래. 내가 잘해서 애들도 다 잘하는 거야'
착각이었다.
아이들의 작은 날갯짓이 나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는 걸 이제 알았다. 큰아이는 글쓰기에서 만큼은 나의 스승이자 선배님이다. 글을 발행할 때마다 피드백도 잘해준다.
'이 부분은 조금 유치해서 내손이 다 오그라들었다.'
'글이 많이 발전된 것 같다.'
'일본작가 느낌이 난다.'
아이의 어떤 피드백도 아직까진 기분 좋다.
"엄마. 목요일 발행하는 날이죠? 오늘은 어떤 글이에요?"
"어 알람 오면 읽어봐."
난 지금도 상상한다.
10년 20년 30년 아이들과 함께 글쓰며 살아가고 있을 나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