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물 없어요?”
코로나가 장기화되니 지금이라도 군대를 다녀와야겠다 생각하여 입대하려 하는데 그마저도 어려우니 속이 탔나 보다.
입영 지원 신청을 했는데 발목 인대가 끊어져 연기 신청한 데다, 좀 괜찮아진 지금에서야 다시 시도를 했는데 3분도 안되어 마감된 것이다. 그래서 또다시 신청하지 못했다.
나는 읽던 책을 멈추고 “물? 기다려. 가져다줄게!” 하며, 소파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다.
평소처럼 오늘 넣어놓은 왼쪽 칸의 물을 꺼내지 않고 어제 넣어놓은 더 시원한 다른 칸의 시원한 물을 꺼내려했다. 시원한 물이 없으면 불편해하는 아들을 위해 평소에 넣는 쪽 말고 잡다한 소스들을 넣어놓은 칸의 시원한 물이 생각난 것이다.
꽉 끼인 옷처럼 틀에 딱 맞게 끼워놓은 물통이 잘 안 빠져 위로 힘을 주어 뺀다는 것이 받침의 프레임, 틀이 위로 올려지면서 빠진 것이다.
그 바람에 옆에 있던 들기름과 스테이크 소스가 바닥에 떨어져 바싹 깨져버렸다.
“아!” 순간이었다.
이 들기름이야 말로 우리 집 음식 재료 중 내가 제일 아끼는 것이다.
친정엄마가 딸 주려고 직접 밭에 들깨를 심어 일 년 동안 힘들게 농사지어 방앗간에서 직접 가서 짠 다음 깨끗하게 세척한 빈 소주병에 정성껏 담아주신 들기름인 것이다.
맛도 맛이지만 엄마의 정성을 알기에... 나는 정말 어이없어 순간 멍한 상태가 되었다.
유리병이 타일 바닥에 부딪혀 박살 났으니 크게 ‘퍽’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족들은 각자의 방에서 모두 나와 얼굴을 내민다.
과외하고 있던 딸은 순간 달려와 “엄마 안 다쳤어요?” 놀라 물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파편을 바라본다.
나도 놀라며 대답했다. “응! 안 다쳤어. 오지 마! 오지 마!” 혹이라도 다른 누가 가까이 와서 다칠까 봐 를 큰소리로 연발했다.
남편은 안방에서 나와 바닥과 나를 쳐다보더니 “뭐야? 조심 좀 하지.. 이그! 아까운 기름들... 얼마나 남았었어?”라고 묻는다.
둘째와 셋째는 난장판 상황을 보며... ‘가까이 오지 말라’는 소리에 잠깐 나의 모습을 바라보다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둥이 만이 오지 말라는 나의 말에 2미터 떨어져 ‘허망해하는 내 모습’을 계속 지켜보며 바라본다.
조심성 없는 나 자신을 때려주고 싶다.
잘 빠지지 않는 순간에 힘으로 하지 않고 천천히 흔들면서 뺐어야 했는데... 들기름 병을 깨트린 나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널 부러진 파편처럼 어지럽다.
‘어린애도 아닌데 없으면 없는 대로, 찬물을 마시던 더운물을 마시던 상관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꾸역꾸역 넣어놓지 말고 평소 냉장고 속 정리를 좀 잘해놓았으면 여유 있고 넉넉하게 마실 수 있었을 텐데...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한참 동안 파편을 휴지로 모아서 닦아낸 후 쓰레기통에 버리고, 잔여가 있을까 봐 청소기로 밀었다.
그런 후 겨우 한숨을 돌리고 소파에 앉으니, 풀이 죽은 내 옆으로 둥이가 다가와 앉는다.
할 일도 많은데 ‘일을 사서 하는 나’를 보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방에서 나온 딸이 “다 치웠어요?” 라며 묻는다.
“완벽히 치우진 못했어. 기름이라 완벽하게 닦으려면 세제 섞어 몇 번 더 닦아야 할 듯해! 정말 바보 같아."라고 말하자,
“고소한 들기름 냄새가 집안을 꽉 채워 좋은 데요! 그럴 수 있지요 엄마!”라며 웃으며 말한다. 이제야 조금 안정된 내 곁에, 바싹 다가와 준 둥이와 딸의 말을 들으니 조금은 위안이 된듯하다.
‘우리는 어떤 때 위로가 필요할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문제의 크기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낭패를 보거나 큰 실수를 할 때 위로가 필요할 듯하다. 또는 예기치 못했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가슴 아픈 이별을 할 때도 있겠다.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는데 결과가 낭패로 다가올 때, 또는 실패한 경험 때문에 낙심하게 될 때도 있으리라.
우리는 이런저런 일들로 많은 위로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위로가 필요할 때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든 구렁텅이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가슴 아파할 때, 진정한 위로가 필요할 때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가는 정말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이다.
절망에 빠진 순간 자신을 바라보면 누군가의 위로가 전혀 먹히지 않는다.
누가 나에게 위로랍시고 잔소리를 해대거나, 어쭙잖은 소리들을 지껄인다면, 혼자 있고 싶다고 얘기하거나 아니면 조용히 하고, 신경 끄시라고 쏘아붙이며 얘기할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 약이야, 시간 지나면 괜찮아져! 나도 그랬어’라고 한다면, 더더욱 위로가 되지 못하리라.
내 맘이 받아들일 준비가 안됐을 때는, 다른 사람 말이 위로가 아니라. 허공의 메아리처럼 울릴 것 같다.
딸은 안 다쳤냐 물었고, 남편은 깨진 기름을 아까워했고, 과외 중이긴 하지만 아들들은 눈치만 보고 각자 위치로 들어가고, 둥이는 2미터에서 나를 계속 지켜보다 안정되니 달려와 내 곁에 앉아있다.
'누가 내게 가장 큰 위로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