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 차이 ‘김시스터즈’들의 첫 하룻밤 여행
#1
팔순 된 엄마를 포함한 원 가족 6명(교감선생님 오빠, 사업가 큰언니, 광명 사는 셋째 동생과 나, 그리고 유치원 원장님인 막내 여동생)이 엄마의 생신을 빌미로 여행을 가기로 약속하며 의기투합했다. 광명 역 근처 사는 여동생과 함께 이른 아침 5시 20분 출발하는 ktx를 타기로 했다. 피곤해하는 나를 남편이 깨워 겨우 일어나 역으로 갔다. 세수도 안 한 꾀죄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니 긴 가죽치마에 부츠를 신고 부얼부얼 털이 달린 짧은 가죽 쟈켓을 입은 아가씨 같은 모습으로 동생이 서있다. 아니, 이른 새벽에 화장에 치마에 옷까지 빼입은 멋쟁이. 종이 다르다. 분명 나와 다른 피인 것이 분명하다.
#2
둘은 익산역에서 하차하여 4명과 합류하여 승용차로 옮겨 통영까지 가기로 했다. 언니와 막내 여동생을 보며 놀라 “엄마와 오빠는 어디 있어요?” 물으니 이번 주 내로 감을 따야 해서 못 온다는 것이다. 그 얘기에 황당해하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감이 뭐가 중요해요. 딸들이랑 놀기로 했음 놀아야지! 감이 좋아, 딸이 좋아! 살림하는 우리들이 얼마나 시간 내기 힘든데, 같이 가기로 했음 가야지요!” 팔순 엄마가 노엽지 않게 최대한 부드럽게 얘기했다.
“응, 그럼 좋은디 감이 좀 더 있다 따면 무를 거 같아서 그려, 이것들도 사람 맹끼로 다 때가 있는겨. 딸 때를 놓치면 다 물르고 먹지를 못혀! 긍게 꼭 따야 혀. 그리고 낼이 장날여. 그랑께 니들끼리 재미있게 놀다와라잉. 담에 꼭 같이 가자!”. 베테랑 농사꾼의 단호하고 힘센 답변에 나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엄마가 가시지 않는다면 오빠도 당연히 못 가는 것이다. 적절한 시기에 수확하여 시장에 팔 수 있는데 팔 수 있는 장날이 내일이라는 것이다. 거기다 오빠는 학교로 출근해야 하니 평일은 도와주지 못하고 주말인 오늘내일밖에 시간이 없는 것이다. 한 달 전부터 예약하고 계획했는데 감이 익어가는 속도를 알 수 없는 데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가 심어놓으신 감들을 버릴 수는 없는 마음도 이해는 갔다. 거기다 오빠가 부지런히 감을 따면 엄마는 헐값이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 주다시피 해서 감을 처리하게 된다. 그 수고로움을 알기에 오빠는 맏이로서 책임을 하는 것이다. 오빠와 엄마의 상호 교환되는 애정의 호흡을 알기에 언니나 동생조차도 말을 못 하고 둘만 오게 되었다 한다.
# 3
“아유 잘됐어. 딸 넷끼리 여행 간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이번 기회에 우리끼리 즐기고 오자!” 무한 긍정의 나는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기분 전환을 하며 그래그래 하며 모두 키득대며 즐거워했다. 여행도 즐거운데 딸들만의 여행이라니! 뭐랄까 단체로 소풍 가다 우연찮게 절친 4명만 그들만의 아지트로 가게 되는 느낌이다. 결혼 안 한 마흔넷 막내인 유치원 원장님이 운전하고, 12살 차이 카리스마 넘치는 사업하는 큰언니, 그리고 언니보다 세 살 어린 유쾌한 겁보 꼼꼼쟁인 나, 또 나보다 여섯 살 어린 마흔일곱의 셋째는 모두 긍정적으로 수용하자는 말에 약속이나 한 듯 즐거워져 엉덩이까지 씰룩대며 모두 차에 올라탔다. 별 다방 투고 백과 빵 귤 등 차 안에서 먹을 것 까지 잔뜩 준비한 후 신나게 통영으로 달렸다. 도착 후 가장 먼저 굴집의 정식 메뉴의 밥을 먹고 458미터의 미륵산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올랐다. 아름다운 섬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통영의 아름다운 경치에 그만 홀딱 반해버렸다. “아니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니 정말 멋지다... 이게 실화야!”를 감탄하며 연거푸 내뱉으니 ‘서울 촌놈 같다’며 동생이 웃는다. 통영이 좋아 제집 지 나들듯 수십 번을 왔다 갔다 하며 캠핑을 즐겼던 막내가 안내자가 되어 통영에 대해 이것저것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름다운 통영은 570개의 섬으로 이어졌고 한국의 나폴리로 유명하다며 아래로 보이는 영운항과 이운항을 가리키며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마을들에 대해서도 설명해줬다. 한산도와 화도, 그 뒤에는 거제도... 한려수도의 절경이 너무도 아름다워 사실 계속되는 설명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렀지만 아름다운 절경 그 자체는 그 어떤 설명보다도 더 가슴을 붉게 물들였다. 설명이 끝난 후 막내는 기억하고픈 한려해상의 풍경과 우리의 모습을 어우러지게 맞춰본 후 카메라를 들여댔다.
“자 사진 찍게 서봐!”
“아니 앞으로 조금만 더 앞으로. 아유, 배 나와 보여 배에 힘주고, 허리 피고, 턱 힘 빼, 조금 내리고 고개 왼쪽으로 아니 그건 오른쪽이잖아 왼쪽, 왼쪽 몰라?” 카리스마 언니가 순한 양이 되어 “아 네 언니!”라며 포즈를 취한다. 띠 동갑 이어도 같이 늙어가는 입장이니 이번 여행은 역순으로 언니 동생이 바뀌는 거라고 차 안에서 막내 동생은 주문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순한 세 마리의 어린양’이 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사진을 계속 찍혀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막내 동생 주문대로 포즈를 취하면 ‘현 상태에서 가장 예쁜 모습’으로 찍힌 모습을 볼 수 있었다.
#4
오후 4시가 조금 넘자 숙소에 짐을 풀고 선착장에 도착하여 요트투어를 했다. 2시간 정도 바다 위에서 음악을 들으며 갈매기에게 새우깡도 주고 일몰도 감상했다.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충만해진 가슴을 안고 우리들의 얼굴은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차가운 바다 바람에 누워 해지는 하늘을 바라보니 어렸을 적 동네 어귀에서 구슬치기나 고무줄놀이를 하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엄마들이 밥 먹자고 외치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본 일몰이 언제였던가 생각하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안 난다니 참 여유 없이 바쁘게 살아온 거 같아 씁쓸한 기분도 들었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우리는 샴페인을 마시고 불꽃놀이를 감상했다. 불꽃놀이가 아름다운 것은 ‘조명탄이 어둠 속으로 높이 올라가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작은 곡선을 그리며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라는 크눌프의 말이 생각났다. 즐거움을 느끼는 동시에 금세 다시 사라져 버릴 거라는 두려움. 하지만 두 감정이 연결되고 지속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지금 네 명의 자매가 느끼는 감정은 시절을 같이 보낸 아름다움과 추억과 소망이다.
#5
감성에 빠진 우리를 현실로 돌아오게 한 것은 배고픔이다. 고픈 배를 달래주기 위해 서둘러 통영에서 유명하다는 다찌집을 향했다. 다찌라는 말은 처음 들었는데 술을 시키면 안주가 딸려 나오는 술집을 일컫는다고 한다. 배고픈 우리는 기분 좋게 술을 한잔씩 하고 나서 어린애처럼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한 명씩 자신의 별명을 얘기했다. 해보, 울보, 삐죽이, 순둥이 퇴색해진 별명을 부르자 순간 어린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우리의 별명이 왜 지어졌는지 분석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보고픈 아버지 생각에 또 울었고, 언니는 헤헤거리며 해보 짓을 하며 달래주려 했다. 셋째는 자신이 가장 민감한 어린 시절에 엄마가 바쁘다는 핑계로 방관되었던 자신의 모습에 대해 불만스러워 자주 성내거나 못마땅함이 ‘삐죽이’로 악순환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 이런 문제를 헤아리고 난 뒤, 결핍이 자양분이 되어, 자신의 아이들이 감정이 상한 이유를 알아달라고 할 때, 미리 알아차리고 돌볼 수 있게 되었고 못된 행동을 할 때는 다시 잘 인지시켜주는 능력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심각하게 얘기한다.
“난 같은 핏줄이 아닌듯해. 생김새도, 성격도 너무 달라” 말하는 눈에 약간의 눈물이 비쳤다. 엄마가 낳은 것은 확실하니 ‘아버지가 다른가?’ 한 번도 생각하지도 않고 말도 안 되는 기막힌 상상이지만 셋째는 나름대로 심각했다. 그 진지함에 우리는 웃지 못하고, 다름이 느껴져 그 말에 모두 수긍하며 그 순간만은 의심이 들었다. 예민하고 까칠하고 지나치게 깔끔하고... 아무튼 우리 셋과 다른 셋째 딸의 아버지는 진짜 누구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어쨌든 그 진실은 뻔하지만 엄마만 알고 계시리라. 그때 언니가 말했다. “막내가 태어날 때는 기억나는데 너 태어난 것은 기억이 안 나네!”라고 말하였다. 그날은 나도 생각났다. 학교 갔다 집에 오니 엄마가 아기를 낳았다며 사람들이 웅성댔는데 딸이라 하니 싸한 분위기가 느껴졌던 상황이 여실히 기억난다. 막내마저 딸이라니 서운한 마음에 집안 분위기는 말을 아끼고 긴 빨래 줄에 하얀 기저귀들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막내가 태어난 며칠 후 기저귀 사이로 목탁소리와 함께 스님이 왔었다. 아들이 아닌 딸을 낳았다는 슬픔을 달래려는 듯 “이 딸이 아들 노릇 다 합니다”라고 말하며 탁탁탁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한참 외우고 가셨던 기억이 난다. ‘그 말이 정말일까!’ 지금 막내는 결혼하지 않고 엄마를 극진히 모시며 산다.
#6
우리는 숙소로 들어와 잠을 청해 자고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여기저기서 뿡뿡거리며 방귀를 뀌어댄다. 수줍음이 많을 것 같은 셋째도 방귀를 뀌며 인사를 한다. 우리는 얼마나 편안하고 좋은지 얼굴만 보고도 깔깔대며 웃어댔다. 하룻밤 자고 나니 이젠 각자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처음 가진 편안한 여행이 아쉬워 어쩔 줄 몰라했다. 막내가 얘기했다. “마지막으로 엄마가 해줬던 오곡밥 먹고 가자!”라고 말했다. 동생이 된 우리들은 ‘네 언니’라고 웃으며 답했다.
식당에 가서 자리를 잡아 음식을 시키니 동생말대로 엄마가 자주 해주었던 나물 종류와 밥이 나왔다. 맛도 아주 흡사했다. 고사리, 청국장, 곰취 장아찌, 조기, 더덕구이, 불고기, 된장찌개, 기장 좁쌀 밥, 찰밥, 맨밥들이었다. 같이 오지 못했지만 오빠와 엄마가 같이 있었다면 너무 좋아했을 밥상이었다. 입맛 돋우기 위해 마신 막걸리 한잔씩에 다시금 속 시원히 속내를 털고 얘기한다. 그리고는 고생만 하신 아버지와 엄마의 은혜에 대한 감사 그리고 각자 어려운 고비고비를 잘 견디고 성장한 것에 대한 서로의 감사가 계속 입에서 나왔다. 물론 나는 또다시 울었다.
사실 여행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 소소한 것들에게 감사하기 위해 떠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어쩌면 누군가의 희생이라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희생 앞에서 나를 돌아보고 너를 이해하며 서로 조화를 이루고 힘들 땐 어깨를 토닥거려주는 것. 서로를 안아주는 것. 이것을 우리에게 일찍부터 가르쳐 주신 지혜로운 아버지. 사고로 죽은 동생까지 6남매를 번듯하게 키우시고 고생만 하시다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 삶과 죽음 앞에서 너무나 그립고 보고픈 아버지와 세 살 아래였던 동생. 어쩌면 우리 기억 속에 살아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동생이니 우리가 죽은 것일지도 모른다. 가족을 떠나보내면 내가 보이고 우리가 보인다. 나를 둘러싼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소중한 눈이 생긴다.
마지막 남은 막걸리를 잔에 따른 후 나는 눈물을 훔치고 소리 높여 건배를 외쳤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 많이 나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운전하게 될 막내를 뺀 세 명의 얼굴에 빨간 홍조가 올라와 오빠와 엄마가 딴 감처럼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그리고는 저녁에 팔순이 넘은 엄마에게 들렸다. 도착하자마자 다짜고짜 웃으며 ‘셋째 딸의 아버지는 누구냐’고 물으며 엄마에게 우리는 장난을 쳤다. 엄마는 웃으면서 놀부 마누라가 썼을 것 같은 고추장 담을 때 쓰는 아주 큰 주걱을 들고 와 ‘미친것들’이라며 욕을 한바탕 하고 딸들의 엉덩이를 한 대씩 때렸다. 웃고 떠들었지만 서로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던 통영의 여행. 누구라 할 것 없이 김시스터즈들의 가슴 깊은 곳에는 또 다른 여행을 꿈꾸며 사랑의 심지가 타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