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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Mar 01. 2022

'나는 오늘이 제일 예쁘다'

인생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처음으로 엄마의 늙은 친구들에게 호기심이 갔다. 자신들의 영정 사진을 재미 삼아 찍는 사람들,

저승 바다에 발목을 담그고 살아 오늘 할 밭일을 해야 한다는 내 할머니, 우리는 모두 시한부.... 정말 영원할 것 같은 이 순간이 끝나는 날이 올까?  아직은 믿기지 않는 일이다.  나중에 희자 이모에게 물었다.  늙은 모습이 싫다며 왜 화장도 안 하고 사진을 찍었냐고....  희자 이모가 말했다.  친구들 사진 찍을 때 보니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자신들에게 가장 젊은 한때더라고.


 누군가 그랬다.  우리는 살면서 세상에 잘한 일 보단, 잘못한 일이 훨씬 더 많다고. 그러니 우리의 삶은 언제나 남는 장사이며, 넘치는 축복이라고. 그러니 지나고 후회 말고 살아있는 이 순간을 감사하라고.                                                                                                                     -박완의 내레이션 중-


여태 살면서 아이들에게 수없이 얘기하고, 나에게 다짐했던 ‘인생 찬가’의 대사를 드라마에서 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본 드라마 중 가장 재미있게 본 작품은 바로  tvN의 ‘디어 마이 프렌즈’이다.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을 만큼 최고의 작품이라 생각하니 내게 있어 이것은 인생 드라마라 할 수 있다.  생각난 김에 다시 한번 그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사흘 내내 시체처럼 누워 16부작을 다시 시청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드라마만 보는 나를 남편은 힘들어했다.   ‘남편이나 애들 밥 차릴 생각 안 하고 드라마만 보는 정신 넉 빠진 여자’ 마치 극 중 석균(신구)의 눈으로 보는 듯했다.  하지만 정아처럼 나는 도리를 다하며 보고 싶은 드라마 보기를 완수했고 기뻤다.  노희경 작가의 대본과  그것을 뛰어넘어 완벽한 역을 소화해 내는 배우들을 보니 황홀했다.  그래서 나는 드라마와 하나가 되어 울고 웃고를 반복하며 부은 눈으로 밥을 하고 고등어를 구웠다.       



호영 (딸) :  엄마 엄마도 여자지? 엄마도 남은 인생 여자로 살고 싶지?  그지?

정아(나문희) : (일하며 버럭) 앙, 내가 무슨 여자야? (답답하고 힘든, 주변 걸레질하며) 물혹으로 자궁 떼 낸 지가 언젠데 내가 여자냐? 그리고 이 나이 들어, 내가 남자면 어떻고 여자면 어때?  지랄들 하고 있어, 아주들...(하고, 설거지하는 모습)     


평생 짠돌이로 일중독으로 사는 남편이 일이 끝나면 세계일주를 시켜준다 약속했다.  그녀에게 세계 일주 여행은 젊은 시절부터 꿈이었다.  배낭을 짊어지고 노브라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미국 영화의 늙었지만 멋진 주인공처럼... 여행을 하는 꿈은 고단했던 그녀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남편의 강제 퇴직 권유 소리에 밥상머리에서 세계지도를 펴 들었는데, 남편 왈 정신없는 여편네! 여행은 무슨 여행, 지랄하고 자빠졌단다.  제주도 여행 한번 못 가보며 시동생 여섯을 다 건사했는데, 시부모 똥오줌도 받아냈는데, 요양소에 있는 내 어머닌 안쓰런 동생들이 건사하고 나는 차비가 아까워 전화질만 하는데, 뭐 지랄?? 그녀는 화장실에서 오줌 싸는 남편을 망연히 보다, '내가 지랄이냐, 니가 개새끼지' -(정아의 말 중)-


신혼초의 약속대로 세계일주를 꿈꾸는 석균(신구)의 아내 정아(나문희). 시부모와, 남편 형제 여섯과 아이 셋을 갖은 고생 후 출가시키고 남편을 떠나 오천만 원짜리 전셋집을 얻어 독립한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신혼여행을 하와이로 갔었다. 남편은 나에게 ‘10주년 때에는 하와이에 다시 꼭 오자’라고 했었다. 하지만 10년 하고도 15년이 더 지났고 이젠 그 약속의 기억마저 가물거린다. 마치 사라진 정아의 간절한 바람이 나에게도 애 키우고 먹고살기 위해 버둥거리다 보니, 커져버린 아이들 크기만큼의 무게로 흔적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진 약속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정아에게 남편에게 복수하려고 딴살림을 차린 거냐고 묻는다. 정아는 복수가 아닌,  그냥 시원한 맥주 한잔 편히 마시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구구절절 모든 것을 얘기하지 않아도 나이 들면 그냥 저절로 느껴지는 감정이 있다.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싫어서도 아닌 ‘시끄러워’라며 조용히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 마치 책임 없던 오로지 나 혼자였던 때를 심리적으로 회귀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엄마들에게는 모두 있다.

박완(고현정)의 가족을 중심으로 엄마의 8명의 동창들이 주축을 이룬다. 이들은 성격이 다른 각각의 시니어 캐릭터들이다. 하지만 쉽게 볼 수 있는 내 모습이며, 딸의 모습이고, 엄마의 모습이자 친구의 현실적 모습이기도 하다. 박완이 화장실에서 계속해서 자신의 뺨을 때리는 장면의 대사다.



엄마의 암 소식을 첨으로 영원이 이모에게 전해 들으며 나는 그때 분명히 내 이기심을 보았다.

암 걸린 엄마 걱정은 나중이고,  나는 이제 어떻게 사나 그리고 연하는 어쩌나.  나는 오직 내 걱정뿐이었다.  그러니까 장난희 딸, 나 박완은, 그러니까, 우리 세상 모든 자식들은,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다.  우린 다 너무나 염치없으므로.      



내리사랑이라는 부모의 사랑과 자식과의 관계. ‘의무와 책임’의 모습들이 나오기도 한다. ‘꼰대’라고 흔히들 말하는 노인들의 행위와 ‘나이 들면 병들고 죽는다는 순리적 물음’들이 이어져 계속해서 관계들은 엮어진다. 하지만 결론적인 주제는 인생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한 인간들의 막장 드라마이며, 막장을 희극으로 받아들이며 감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배우가 되어 연기를 할 수 있다면... 그럴리는 없겠지만 상상이다. 박완의 역할을 한번 해보고 싶다. 이런 상상을 하기에는 이미 청춘이 많이 지나갔음에 상상이 잘 되질 않는다. 늘씬하고 이쁜 데다 지적이기까지 하는 고현정의 박완 모습을 보니 기가 죽는다. 그래도 상상이니 이왕이면 젊고 예쁜, 오지랖 넓고, 똑똑하고, 사랑스럽고 사랑받는. 거기다 잘생긴 서연하(조인성)와의 로맨스까지... 프로 포즈 받는 날 연하의 사고로 아픈 사랑이 버렸지만 진정한 사랑을 찾고 선택하는 여자. 거기다 아름다운 슬로베니아의 풍경 속에서의 연하(조인성) 와의 연애라니 얼마나 달콤할까. 그리고 한 번 더 상상해본 역할은 86세인 오 쌍분 (김영옥) 여사이다. 온갖 시집살이를 하며 젊을 적 남편의 폭력과 바람에 고생했다. 지금은 남편 병시중을 하며 자신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남편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귀여운 욕쟁이 할머니다. 난희의 엄마이자 박완의 할머니. 인물 가운데 최고 연장자지만 사륜바이크를 타고 운전하며 적극적이며 활동적이다. 입은 걸어도 매사에 긍정적이고 밝은 것이 맘에 든다. 쌍분 여사는 자신이 삶을 견뎌 온 게 스스로 대견하다. 그래서 인생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냐는 박완의 말에 “별 것 없는 인생, 이만하면 괜찮지”라는 말로 대답한다. 삶의 무거움을 가볍게 승화시키는 지혜가 있어서 좋다. 상상의 꼬리를 계속 물다 보니 박완보다는 쌍분의 역할이 내게 더 잘 맞을 것 같다.

딸은 이제 대학을 졸업했다. 큰아들은 군에 가기 일주일 전이고 막내 녀석은 대학 신입생이라 기숙사로 가게 된다. 각각 20년을 넘게 같이 살아온 가족이 이제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처한 상황과 위치에 맞게 떠나야 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모두 시간을 내서 사진관에 가서 사진 한 장 찍자고 했다. 아들들과 남편은 모두 귀찮아했지만 엄마의 권유와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에 모두 시간을 내겠다고 허락했다. 그렇게 '포시즌'이라는 사진관에 가서 함께 보낸 우리들의 계절들을 생각하며 사진을 찍고 왔다. 찍는 내내 희자(김혜자)의 말처럼 '이 순간이 가장 젊을 때이며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캘리를 써서 거실의 벽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는 쌍분 여사처럼 고백했다. “별것 없는 인생. 이만하면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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