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기운이 내게 남긴 것

by 지니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어릴 때부터, 자라면서 겪게 되는 형제들과 친구들이 나의 기대에 못 미치고 나아가 내 맘을 몰라주는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의 생각에 상처를 받긴 했지만 소소한 것들이어서 자연스럽게 잊히기도 하고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중학교 이 학년 때 사람에 대한 믿음이 무너져버리는 사건을 겪은 일이 있다.

읍내에서 30분 정도 들어가는 시골에서 살았었다. 아버지는 논과 밭의 일부를 팔아 그 돈으로 소도시에 집을 사서 이사를 했다. 자신의 못 배운 한을 애들에게 대물림할 수 없다는 취지와 좀 더 큰 도시에서 살아야 발전된다는 결단에서 나온 이사였다. 새로 산 집은, 명문 고등학교 앞에 있는 90평 정도에 방이 11개인 꽤 큰 집이었다. 대로변에 위치해서 가게와 연결된 방 3개가 안방과 작은방이 되고 나머지 방은 세를 놓았다. 농사가 바쁜 와중에 가게에 신경을 쓸 수 없어 가게를 운영하지 않는 것이 맞았지만 부모님은 가게를 쉽게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목이 좋아 저절로 장사가 되는 위치였고 담배와 우표를 팔 수 있는 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집 앞 고등학교 학생 수는 천명이 넘게 다녔고, 도로 자체가 넓어 유동인구가 아주 많았다. 우리 5형제들은 시간이 되는대로 가게 일을 도왔다. 자식들이 돌아가며 알바 생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가게라고 해봤자. 4평도 채 안 되는 공간이어서 과자 종류도 많지 않았고 주류 품목은 담배와 우표, 그리고 아이스크림 정도였다. 그래서 특별히 신경 쓰고 관리할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애들 용돈이라도 벌면 그게 어디냐’며 가계부를 쓰면서 담배 값과 물품 목록의 가격을 알려주며 돈을 받아 정리하는 법까지 알려주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보고 엄마는 가게를 부탁하며 “밭에 풀이 많이 생겨 생강 농사가 엉망이야!”’라며 후다닥 서둘러 일을 하러 가셨다. 나는 한자 쓰기 숙제를 하며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 드르륵 하고 문이 열렸다. 양복을 입은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젊잖게 보이는 아저씨가 들어오셨다.

“어서 오세요! 뭘 드릴 까요?” 하며 내가 묻자

“어머니는 어디 가셨나요? 나 여기 고등학교 3학년 2반 담임 선생님인데 솔담배 2보루와 은하수 1보루 줘요.”

“네?” 나는 깜짝 놀랐다. 보통 한 갑씩 사 가는데 3보루라니 그럼 30개를! 나는 놀라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침에 어머니께 말씀드렸는데 담배 먼저 가져가고, 한 시간 후 정도 돈은 가져다 드린다고 말했었는데....”

“제가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요?”라며 대답하자.

내가 단골이라 어머니와도 친한데. 얘기를 왜 안 했는지 모르겠다며 화를 내셨다. 오늘 급히 다른 선생님들께 담배를 드리기로 했다면서 이미 엄마와 약속을 했다며 빨리 달라고 다그쳤다. 엄마에게 확인하고 싶었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거기다 그 아저씨는 집에서 꽤 먼 나의 중학교 이름까지 대며 엄마와 얼마나 친한지 너스레를 떨었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달라고 재촉하자 나는 학교 선생님의 이름을 노트에 적고 담배 3보루를 그냥 드렸다. 엄마가 오시기 전에 당연히 아저씨는 만 삼천 삼백 원이라는 큰돈을 가지고 오실 줄 알았다.

하지만 약속한 시간을 넘어 두 시간이 넘었고, 해는 어둑어둑해져 가며 엄마가 오실 시간이 가까워졌다.

그때서야 외상으로 담배를 가져간 아저씨가 어린 내게 한 약속은 ‘거짓 사기’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너무 놀랐지만 이 사실을 부모님께 고백하지 못했다. ‘매번 목돈으로 사서 푼돈을 받으니 이게 이익이 남는 것 같지 않다’고 고민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빨간 볼펜으로 자를 대고 줄을 쳐서 한쪽 칸은 날짜와 다음 칸에는 판매내역을 기록한 노트의 뒷장에 ‘3-2반 최인혁’이라는 이름을 적은 한 장을 몰래 찢었다. 그 후로 내가 가게를 보게 될 때 학생들이 오게 되면 “혹시 최인혁 선생님 아세요?”라며 물어보았다. 당연히 대답은 '모른다'였다. 그 대답을 알면서도, 어린 마음에 아마 믿고 싶지 않았던 ‘속임 당함’을 인정하기 싫어서, 아니면 속은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으로 재차 질문을 했던 것 같다.

정말 인간의 본성은 악한 것일까? 나의 생각은 왜 무디고 순진해 빠져 아저씨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을까? 교복을 입고 있는 데다 이 근처 여자애들은 모두 A 중학교를 다니니 알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은 너무 뻔한 추측이 아니던가. 여기서 5천 원 의치 열 번을 팔아야 5백 원 남는 것을, 순식간에 만 삼천 삼백 원이나 아무런 의심 없이 덜커덕 줘버리고 어쩌자고 대책 없는 행동을 한 것일까? 이 아저씨의 이름은 본명도 아닐 텐데 왜 의심하지 않았을까? 이처럼 사람들은 정말 악한 것인가? 부조리한 것으로 가득 찬 것이 이런 세상이란 말인가? 라며 감수성 많은 소녀가 세상의 죄와 악의 문제를 혼자서 심각하고 어렵게 받아들인 사건이 되었다. 또한 세상이 내 맘 같지 않고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도 깨닫게 되는 일이 된 것이다.

사회인이 되면서 알게 모르게 여러 번 속고 속이는 작은 문제들도 있었겠지만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사건은 어렸던 내게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겨져 있다. 이런 일이 아직까지 내 기억에 남는 것을 보면 분명 작은 일은 아닌 것 같다. 돌아보니 나는 지인들과 돈을 꿔주거나 빌리는 거래를 안 한다. 아는 사람은 더더욱 관계를 잃게 될까 봐 조심스럽다며 그런 적도 없으면서 하질 않는다.

여기서 내가 배운 교훈은 남의 말을 쉽게 믿지 말자일까? 아니면 거래를 할 때는 정확한 확인을 하고 하자일까? 또 내가 아쉽고 줘야 할 의무도 없는 상황이면 남의 사정 따위는 관심을 갖지 말자 일까? 아니면 돈을 받기 전에는 물건을 주지 말자일까? 써보니 모두 같은 말일 것 같으면서도 다른 말이다.

그때의 이야기를 엄마에게 말해야지 하면서도 얘기하다 보면 웃고 떠들다 잊어버린다. 그래서 오늘은 생각이 난 김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옛날에 가게 할 때 어떤 아저씨한테 속임 당해 담배 3보루나 준 적 있다. 그때 어린 내겐 큰돈이었는데~.... ”

그 말을 듣던 팔순 된 엄마는 하하하 웃으며 왜 뜬금없이 이 얘길 하냐며 자신이 당한 사기는 열 건도 넘는다고, 그래서 아버지한테 욕을 엄청 먹었다고 하셨다.

“모전여전인가?” 내가 웃으며 얘기하자

“고것이 거짓말잉게 그 놈들이 양심에 찔리것지. 아. 그런 안 좋은 걸 더 폈응게 얼매나 빨리 죽었겄어! 진작 모두 뒈졌지. 죄는 지은데로 가고 물은 트는 데로 간다자녀!”라고 말한다.

맞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덕을 쌓으면 복을 받는다”는 말처럼 이미 지난 일이고 잘못했으면 지들이 알아서 괴로웠을 거다. 처음 악의 기운을 느낀 세상을 보는 시선은 이미 살면서 선의 시선으로 바뀐 지 오래다. 세상은 처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더 좋은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도 나의 시선은 부정적 경험에 고착되어 있고 무의식에 숨어있다가 재개되었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부정적 경험을 덮고 열 번을 속으면서 다시 희망의 외상을 주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 그것은 나도 사랑하는 단어이다.


참고 : 한산도 은하수 330원, 솔 500원 장미 600원 청자 200원의 담배 가격은 아직도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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