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우울하지 않은 우울증

"사는게 귀찮을 뿐이야.."

by 혜랑

2021년 9월 큰 걱정 없이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집 근처에서 자주 보이던 정신건강의학과에 들어갔다.

할머니, 아저씨, 젊은 아가씨, 청소년 등 다양한 사람들이 대기실에 붐볐다.

대기하는 동안 건네받은 검사지 몇 장을 작성했다.

'자살'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콧웃음을 쳤다.

'난 우울하지 않다니까.'

내 이름이 불리고 원장실로 들어갔다.

편안한 공간에 더 편안한 목소리로 앉아있던 선생님을 만났다.

"중증의 우울증입니다."

"제, 제가요? 전 안 우울한데요? 전 자살충동도 전혀 없고 일상도 평화로워요. 삶에 불만도 없어요."

검사지를 천천히 살피며 선생님이 물었다.

"하고 싶은 것 있어요?"

말문이 턱 막혔다.

그냥 해야 해서 하는 수많은 일들, 집안일, 회사일, 아이들을 챙기고 살피는 나의 일들..

그 사이에 문득 진짜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게 떠올랐다.

"저... 자고 싶어요. 그냥 아무도 깨우지 않고 잘 수 있다면 계속 잠만 자고 싶어요."

선생님은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머금고 다시 물었다.

"언젠가 깨어나긴 해야 하잖아요."

나는 이어진 내 내 답에 스스로 놀라며 내가 우울증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아니요. 깨어나고 싶지 않아요."


병원에 오기 전 나는 점점 잠을 많이 잤다.

일터에서는 거의 날아다니며 일을 했다.

일 자체는 재미있었고 뿌듯했다.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다.

그럴수록 집안일은 조금씩 소홀해졌다.

집엔 내가 해야 할 일이 점차 쌓여갔다.

삼 남매와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돌아가며 개인시간을 보내야 했다.

언젠가부터 '엄마!'라는 부름만 들어도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나는 잠을 자고 싶었다.

드라큘라처럼 햇빛을 보면 죽을 것 같은 사람처럼 그냥 어딘가에 처박혀서 잠에 빠져들고 싶었다.

그리고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잠이 드는 밤이 이어졌다.


진단을 받은 후 바로 약물치료를 시작했다.

아침, 점심, 저녁, 자기 전.. 생각보다 약봉투는 두둑했다.

2주 치 약을 받아 들고 병원문을 나서며 옆에 나란히 있는 안과에서 나오는 환자분과 눈이 마주쳤다.

왠지 스스로 작아지는 기분이 들어 일부러 더 씩씩한 척하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약을 먹으니 곧장 졸임이 왔다.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졸음이었고 고꾸라져 그냥 잠을 잤다.

나는 매일 아침 정신을 부여잡고 출근해 온 에너지를 끌어모아 씩씩하게 일을 했다.

이후 집으로 돌아오면 애들 밥도 못 챙기고 그냥 기절해 잠이 들었다.

옷도 못 갈아입고 씻지도 않고, 심지어 제대로 눕지도 않고 고꾸라져 잠이 들곤 했다.

2시간 뒤 퇴근 한 남편은 애들 밥도 차리지 않고 잠드는 날이 이어지자 내게 물었다.

꾹 참은 화가 남편의 목소리 끝에서 대롱거렸다.

"약을 먹었는데도 더 잠을 자는데, 약이 이상한 거 아니야?"

"선생님이 졸릴 거라고 했어. 근데 그냥 졸리는 정도가 아니라 기절할 것처럼 졸려. 내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일어나려고 해도 그게 안돼."

"후..."

남편은 들릴락 말락 하게 한숨을 쉬고는 방문을 닫고 나갔다.

속상할 틈도 없이 바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나 충분히 자고 일어나면 선명한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래, 내가 엄만데 애들 밥은 해야지. 나 살겠다고 잠이나 퍼질러 자고..'

나처럼 모자라고 부족한 엄마를 둔 아이들이 불쌍했다.

뭣도 모르는 아이들은 엄마가 힘들다며 불을 끄고 문을 조용히 닫은 후 자기들끼리 작은방에서 조용히 놀았다.

미안한 마음이 스스로에 대한 자책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나를 향한 자책감이 팽팽하게 시위를 당길 즈음 두 번째 진료를 받았다.


선생님은 나의 고민을 천천히 다 들으셨다.

이후 빙긋 웃으며 말씀하셨다.

"좋아지고 있네요."

나는 의아해했다. 내가 2주간 한 거라곤 그냥 고꾸라져 잔 것뿐인데 좋아졌다니.

"미뤘던 잠을 충분히 주무시고 나면 바로 쌩쌩해지는 건 아니지만 조금씩 기운이 날 겁니다. 일어나서 움직이는 것도 좀 편안해지시고요. 지금 환자분은 게으른 게 아니라 우울한 거예요. 치료해야 해요. 가장 좋은 약은 잠이니, 약 잘 챙기세요."

의사 선생님의 확신 어린 말씀에 이후 나는 남편에게 당당히 말했다.

"여보, 나 우울증 환자야. 약이 적응될 때까진 더 잘 거야.

그러니 그렇게 알고 있어 줘.

나는 이제 우울증 진짜 열심히 치료할 거야.

완쾌되게 도와줘야 해!"

남편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불안함이 가득 차 일렁거리는 눈으로 말이다.

당연하지 않았던 남편의 당연함은 이후 시시각각 살아 숨 쉬는 내 우울을 쿡쿡 찔러대곤 했다.

이전 01화1화. 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