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오금아
몇 년 전부터 ‘금쪽이’라는 말이 자주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은영 박사님의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면서 처음은 '귀하디 귀한 존재'라는 뜻으로 여겨졌지만 방송에서 나오는 아이들을 보면 금쪽이라는 말속에는 ‘귀하지만 다루기 힘든 존재’라는 뉘앙스가 더 크게 느껴졌다. 나 또한 자식을 키우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아이안에서 솟구쳐 오르는 금쪽이를 만났다 헤어졌다를 타협하며 타이르는 시간을 반복했던 기억이 났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기 싫다고 버티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폭발하고, 그러면서도 다시 화해하고 성장하고 그렇게 아이들과 나는 변화해 갔다.
오십 즈음이 되면 모든 것이 차분해지고 하고 싶은 일도 하기 싫은 일도 흐릿해질 줄 알았다. 그래도 막상 무언가를 시작해 보려 하면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작은 방해꾼이 있었다. 바로 내 안의 금쪽이였다.
운동을 하려고 하면 금쪽이는 슬쩍 다가와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야. 여기저기 쑤시잖아. 몸이 솜방망이 같아.”라며 투덜댔다. 책을 펼치면 “자꾸 눈이 침침해, 집중도 안 되잖아.”라며 드라마를 켜게 만들고 영어공부를 하려고 앉으면 입을 꾹 다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건강을 지키자고 건강식품과 몸에 좋은 식단을 챙겨놓고는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오늘 하루 피곤하고 힘들었잖아. 매운 안주에 맥주 한 캔쯤은 먹어야지.”라며 달콤한 유혹을 건넨다.
때론 더 엉뚱하다. 편안하게 소파에 드러누워 사그라든 연애세포를 깨우겠다며 “선재야~” 하고 장난스럽게 부르기도 하고 사소한 일에도 울다가 웃다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발끈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사춘기 딸아이보다 더 다루기 힘든 갱년기 금쪽이가 내 안에 버티고 앉아 있음을 실감한다.
휴… 내 안의 금쪽이는 생각보다 많았다.
도대체 이 금쪽이들을 어떻게 다 달래고 키우라고, 이렇게 한꺼번에 끄집어내 놓았단 말인가.
그런데 오십이 되어 나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이 금쪽이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사실 그들은 나를 괴롭히려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프다고 칭얼대는 것도, 하기 싫다고 버티는 것도, 웃다가 울다가 흔들리는 것도, 결국은 나를 지키기 위한 서툰 몸부림이었다.
그 작은 금쪽이들은 오십 년 동안 내 곁을 지켜온 나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내 안의 금쪽이와 마주 앉아 인사를 나누려 한다.
반갑지만, 동시에 두렵고 불안하다. 왜 이제야 제대로 보게 되었는지 미안하기도 하고 그동안 내 안에서 외로이 버티며 살아온 금쪽이가 측은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 감정들 속에서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제는 더 이상 금쪽이를 숨기거나 다그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마주하며 품어주고 싶다는 것. 오십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내 안의 금쪽이에게 손을 내민다.
“안녕, 그동안 외로웠지? 이제는 내가 너와 함께 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