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하는 MJ 씨
11월부터 3월까지 이어지는 하노이의 겨울은 몹시 스산하고 쓸쓸하여 그야말로 잿빛이다. 온통 희뿌옇고 탁한 날씨의 연속은 날 더욱 깊은 우울로 몰아넣었고 이 선택이 맞는지 매일 자문자답을 해야 했다.
날씨변화에 무척 예민하고 영향을 받는 나는 하노이 온 첫해에
'이렇게 미세먼지가 심하고 글루미 했으면 오지 말았어야 했어 '
라는 말을 곱씹고 되삼 키며 하노이행을 결정한 것에 대해 몇 번이고 후회를 했었다.
하지만 이 시간도 내가 선택한 일이고 날씨는 결정할 수는 없지만 날씨에 대한 마음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라 세뇌하며 1년이 지나 또 1년을 맞이하였고 잿빛 하늘은 매일같이 눅눅한 공기와 함께 내 마음까지 눌러앉았지만 결국 이 시간도 내 삶의 일부라는 걸 인정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또 한 해를 살아냈다.
나는 평범한 가정의 막내로 태어나 스물세 살에 나의 운명임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은 남편을 만나 찐한 연애를 시작해 결혼을 하고 예쁜 두 딸을 낳고 키우며 완전한 사랑을 이루고 살았다. 결혼이 주는 안정감과 충만함이 삶을 가득 채웠고 사랑으로만 키운 아이들과 우리의 시간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이런 일상은 쳇바퀴 도는 듯 무료했고 한국사회의 고질인 비교와 결핍, 위선에 서서히 잠식당해 조금씩 곪아버린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그 안에서 흐르는 시간을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안식년을 선포하며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우리 가족은 둘은 한국에 둘은 하노이에 남는 강제 이별의 시간을 살게 되었다.
긴 연애와 결혼의 시간 동안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언제나 기꺼이 응원해 준 남편 덕분일까. 아이들 역시 엄마의 안식년 선언에 불만스럽거나 불평을 하고 거부하기보단 엄마의 선택을 존중하고 우리 가족이 이 상황에서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잘 지낼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해 주었다.
그들은 언제나 내 선택을 존중했고 나의 부재 속에서도 각자의 자리에서 단단히 자라주었다.
그렇게 받아낸 아깝고 귀한 시간인데
나는 진정 이 시간을 원하고 사랑하고 있는 걸까?
지난날의 나는 늘 지쳤다고 힘들었다고 말했지만 이제 와 돌아보면 그 안엔 사랑이 있었고 행복이 있었으며 배려와 헌신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오곤 한다.
오금이를 만나겠다고 모든 익숙함을 내려놓고
낯설고 생경한 하노이로 무작정 떠나왔지만
지난 20년의 시간은 내 안을 갉아먹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내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봄날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아이들을 키우며 나는 늘 나 자신을 희생했다고 생각했다. 어떤 선택지에서도 나 자신을 늘 뒤로 미루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가족들은 항상 날 먼저 생각했고 존중했으며 나의 희생을 사랑이란 단어로 품을 수 있고 그 안에서 행복할 수 있게 언제나 내편이었고 엄마가 아내가 우선이었다.
나 또한 내 인생의 우선순위가 언제나 가족과 아이들이었기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내 모든 에너지를 그들에게 쏟았으며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었지만 한국의 엄마로 살아온 환경과 익숙한 역할 속에서 나는 더 열심히 더 절실하게 그 역할에 몰입했었다.
이제 둘째와 함께 보내는 하노이의 시간도 어느덧 2년이 되어간다. 이 시간은 내가 원했고 내가 선택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금아, 넌 정말 이 시간을 사랑하고 있니?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하루를 감사하며 살고 있니?
운동을 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일도 하며 내 취향을 찾아보겠다고 결심했지만 또 어느새 일상에 묻혀 그 소중한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있다.
정말 이 시간을 사랑한다면 간절하다면 이렇게 허투루 보낼 수 있을까.
단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치열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결과가 생기고 변화가 일어나고 무엇보다 내가 이 시간을 ‘사랑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시간은 그저 비워내는 여백이 아니다.
이건 내가 어렵게 되찾은 간절히 바란 나 자신에게 돌려준 두 번째 시간인만큼
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깊이 향유하며 진심으로 사랑하자고 다짐한다
아마 이것이,
내가 지금 이 하노이에서 배워야 할 가장 큰 숙제이자 깨달음일 것이다.
결국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은 두려움을 안고 한걸음을 내딛으며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는 일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