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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SNS의 도리언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현대 사회를 시사하는 점

by 길거리 소설가



오스카와일드의 장편소설 '젊은 도리언의 초상'은 1891년 몇 가지 논란들과 함께 출간했다. 하지만 이 글은 그 논란과는 무관한 내용이기 때문에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다. 소설만 놓고 본다면, 유미주의적 색채가 짙은 묘사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각종 수사들이 상상력을 자극하고, 대화체의 구성과 몇 없는 등장인물 간의 빠른 전개는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소설은 20살이 넘은 도리언이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준 화가 바질 홀워드로부터 헨리 워튼 경을 소개받으며 시작한다. 20살의 도리언은 너무 젊었기 때문에 그 젊음이 영원할 것이란 막연한 기대가 있었지만, 헨리로부터 '영원의 아름다움은 없다'는 말을 듣고 좌절하며, 앞으로 그에게 다가올 세월의 저주를 초상화가 짊어질 수 있다면 악마라도 계약하겠다고 울부짖는다. 그리고 그 어린 소년의 절규는 이뤄진다. 긴 세월 방탕 속에 살아간 도리언에게는 늙음도, 추함도 없었다. 단지 다락 구석에 베일에 가린 그 초상화만이 흉측하게 변해갔다. 가끔 그는 다락에 들러 자신의 초상화 속 늙고, 추한 모습을 보고는 안도감을 느끼고, 나아가 조롱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시골의 젊은 처녀 해티 머튼을 만나 자신의 삶이 얼마나 방종했는지에 대한 양심을 가책을 느끼곤, 고민 끝에 모든 원인인 그 '초상화'를 칼로 찌른다. 초상화 속 자신의 가슴팍을 칼로 찌르자, 그 칼은 도리언(실제) 자신의 가슴에 박혀버렸고, 그림속 흉측한 도리언은 다시 젊었던 순수한 도리언으로 바뀌는 반면, 칼에 찔려버린 도리언(실제)은 누적된 세월의 풍파를 한 번에 맞으며 추한 몰골로 죽어갔다.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내'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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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내용이 단순하기에 그 주제도 단순했다. 다만, 다른 고전소설들이 그렇듯 이 소설 또한 현대사회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21세기에 살아간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강제로 자신을 내보이고 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소외받지 않기 위해 SNS를 통해 끊임없이 '나'를 소개하고, '내'가 무엇을 하는지 보고한다. 그래야지만 남들에게 인정받고, 스스로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SNS' 그 자체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그저 도구니까 말이다. 내 손에 들린 칼이 고기를 썰면 식칼이 되고, 사람을 해치면 살해도구가 되듯, SNS 역시 누군가에게는 소통의 창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목젖을 옥죄이는 밧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도리언은 자신의 젊음을 위해 악마와 계약하고, 행동의 결과는 초상화에게 넘겼다. 그리곤 자신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반면, 현대사람들은 내면의 악마와 계약을 했다. 남들에게 보이는 자신을 위해 성형을 하고, 무리한 다이어트를 하고, 분에 넘치는 소비를 하고, 남들이 시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찾아서 자랑했다. 그리고 그 행위에 대한 결과는 미래의 '나'에게 떠넘겼다. 아름다움이라는 욕심에 과도한 성형수술로 자신을 망친 사람들은 종국에는 괴물이 되어버린 자신의 몰골을 보며 파멸하고, 무리한 다이어트로 곡기를 끊은 사람들은 거식증에 걸려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것이 그러하다. 그들은 모두 삶의 본질적인 '생존'이라는 개념을 무시한 대가를 달게 받았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연민이 느껴지는 이유는 도리언이 절규 한번에 얻은 영원의 젊음을 현대인들은 오랜시간 자기 의지하에 노력해서 얻은 결과라는 점이다. 자기파괴와 노력이라는 역설적인 모순을 껴안은 현대사회 속 그들의삶을 우리가 조롱하고 비난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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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와일드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라는 작품을 써낸 1891년에는 영상매체 따위는 없었다. 최초의 영화(영상매체)는 1895년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만들어진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고, 최초의 TV는 50년 후인 1950년에 발명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영상매체의 발명이다. 과거에도 사람들은 현대인만큼이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했고,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본래 사람이라는 생물이 그러하니 말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이런 일련의 활동들이 지극히 소박했을 것이다. 그저 그 동네 사람들과 주고받는 말 몇 마디, 어떤 귀족의 파티에 초대되어 이쁜 옷을 자랑하는 정도가 그 시대의 SNS였다.


19세기 후반까지도 시대의 유행은 지엽적이었고, 다른 곳의 유행이 넘어오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자연스레 사람들은 각자의 개성에 맞춰 꾸미고 행동할 수 있는 시대였다. 하지만 영상매체가 발전하면서 모든 유행은 개성중심에서 주입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내 사람들은 자신만의 멋을 잃어갔다. TV에서 방영되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따라 샀고, 같은 포즈를 취하며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았다'는 안도를 했다. 국내로 치면 1967년도 윤복희 씨가 처음 입은 '미니스커트'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지금생각해 보면 당시 미니스커트는 혁명적이고 새로운 시대의 도약 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모든 사람들이 같은 욕망에 눈을 떠버린 날이기도 하다 . 그럼에도 당시의 유행은 소유하지 못한 불행은 있을지언정 창조하지 못해 울부짖는 현대인의 불행은 없었다. 앞서 말한 SNS발달은 단순하게 유행을 소유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유명한 아이돌이 춤을 추면, 금세 따라 하는 동영상이 동시다발적으로 업로드된다. 문제는 춤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춤을 추기 위한 선행적 조건들이 그 아이돌과 동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앞서 현대사람들은 내면의 악마와 계약했다는 말을 했다. 그 악마는 내가 동경하는 우상과 같아지려는 마음속의 속삭임이다. 그들처럼 되기 위해 성형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고, 무리한 소비를 한다. 그리고는 SNS를 통해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알린다. 그러면 '나'라는 존재는 나보다 못한 존재들의 새로운 '우상'이 된다. 마약과도 같은 관심을 끊어내기란 쉽지 않다. 잠시나마 내게 건너온 스포트라이트가 꺼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불가능한 도전을 쉼 없이 한다. 그리고 쉼 없는 도전 속에서 점점 사람들은 '자신'를 잃어갔고, 또 잃어가는 중이다. SNS의 발달은 더 많은 사례 속에서 다양한 문제들을 야기한다. 다만, 그 수많은 문제들의 핵심은 모두가 도리언처럼 순간의 젊음 혹은 외면의 아름다움에 치중하는 그릇된 이상향의 결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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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이 다이어트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며칠 전, 초등학생들의 다이어트 경험에 관한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깡마른 아이가 살을 빼기 위해 제한된 식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보고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사회는 그렇게 발전했고, 또 그렇게 나아갈 것이다. 갑자기 선사시대로 돌아가지 않는 한, 이런 시류를 거역하지는 못한다. 무조건 SNS의 소통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언의 젊음에 대한 욕망이 파국으로 치닫듯이, SNS를 통한 제2의 도리언, 제3의 도리언의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의 경계가 필요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도리언의 죽음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만을 다시 강조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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