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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조금 특이한 버킷리스트(完)

by 길거리 소설가

“병이 나으실 때까지, 기억감퇴증상이 동반될 수 있습니다”

“기억감퇴요?”


최근 기억력이 좋지 못했다. 친구와 나눈 어제 대화, 아침에 나눈 부모님의 당부 모두 몇 시간만 지나면 머릿속의 휴지통으로 직행했다. 나는 그들이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 내게 다시 전화를 걸 때까지 까맣게 그들과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기를 몇 달이 됐다. 단순히 업무가 많아 ‘번아웃’ 같은 증상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현대인들이면 누구나 겪는 그런 증상 말이다. 하지만 내 정확한 병명은 ‘번아웃’같이 주변의 압박과 같이 심리적인 요소들 때문에 생긴 단순한 병명이 아니었다. 의사 입에서 말한 것은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약물치료를 통해야지만 날 수 있는 병이었다. 그렇다고 그 병이 죽을 만큼 괴롭히거나 하는 것은 또 아니었다.


그 점에서는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감사했다. 그럼에도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2주, 혹은 그 이상 약물치료를 해야 하며, 그럼에도 낫지 않는 경우 수술도 염두해야 한다고 했지만, 수술까지는 잘 가는 경우는 없다고 안심시켰다. 그러면서 병을 낫기 위한 몇 가지 방법들도 더 설명했지만, 어차피 하지 않을 것 같아 귀담아듣지 않았다. 의사는 내게 ‘무기력’,‘식욕감퇴’ 등 추가 증상을 설명하고는 약을 잘 먹으라는 당부의 말을 끝으로 간호사에게 눈짓했다. 의사가 눈짓한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어쩐지 황망한 간호사의 눈빛은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진료실을 나가주었음 하는 바람으로 비쳤다. 의사와 간호사 중간에서 눈치를 살피고는 지체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흰색 진찰실 문을 열고 나온 화요일 10시의 병원의 느낌은 한산하게 느껴졌다.


환자보다 많은 간호사가 데스크에 앉아있고, 뭐가 바쁜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은 채, 연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고요한 적막 속의 타닥거리는 타자소리는 눈을 감고 들으면 마치 장작이 타는 소리로 착각할 정도였다. 진료실과 병원로비 사이의 비좁은 문지방에서 나는 자연을 봤다. 신기한 경험이다. 기억력이 떨어지고, 무기력해지면서 평소에 간과했던 다른 세포들이 눈을 뜬것인지? 굉장한 감수성에 사로잡혀 눈에는 눈물까지 고이고 있었다. 주책이라고 생각하고는 붉혔던 눈시울을 이내 거두곤 담담히 로비에 앉아 수납을 기다리려고 앉아마자 나를 호명하고는 내 이름이 불린 간호사에게 가자 진찰실의 간호사와 마찬가지로 황망한 눈빛을 한 간호사가 앉아있었다. 사무적으로 딱딱하게 내게 금액을 말하고는 처방전을 건넸다.


그 순간에도 그녀의 양 옆의 간호사들은 연신 타자를 두드리며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타닥거리는 소리에 집중하자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병으로 사라진 기억 중에 모닥불과 관련된 감동적인 스토리가 있나 보다. 병으로 인해 조금 남은 내 기억력이 쓸 때 없는 생각으로 좀 먹지 않기 위해 고개를 저으며 머리를 비우곤 처방전을 가지고 나왔다. 약국에서도 사무적인 약사가 딱딱하게 약을 조제하고 설명했다.

달랑 약봉지를 들고는 집으로 향했다. 계속 멍한 상태가 어쩐지 내 병명에 대한 ‘증상’으로 보였다. 아직 밥은 먹지 않았지만, 멍한 ‘증상’이 병인지 뭔지 알고 싶어 약봉지에서 약을 하나 떼서 먹었다. 만약, 증상이 없어진다면 내가 방금 겪은 ‘멍한 상태’는 필시 병 때문이니까 말이다. 약을 먹기 위해 물을 찾아 거실 식탁으로 향했는데, 식탁 위에는 공과금 고지서와 얼마간의 돈이 놓여있었다. 내가 그것들을 보자 머리가 갑자기 밝아지며, 아침에 엄마와 나눈 대화가 번뜩였다. ‘오늘 까지니까 병원에서 오는 길에 꼭 은행에 들러서 공과금을 내야 한다’. 바보같이 엄마의 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것도 병 때문이겠지?라고 괜히 민망함에 소리 내어 말해봤다. 나는 공과금 고지서와 얼마간의 돈을 들고 다시 나왔다. 다행히 근처에 은행이 있기에 작은 수고로 내 실수를 덮을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전의 은행은 한산했기다. 은행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자 한기가 돌았다. 그리곤 ‘삐’,‘삐’ 거리는 소리가 신발을 벗는 내내 귀를 때렸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출처 없는 소리꾼이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그 달갑지 않은 소리에 몸을 맡겨 두리번거렸다. 냉장고가 열려있다. 내가 냉장고의 문을 닫지 않아, 그렇지 않아도 바쁜 냉장고에서 소리꾼을 꾀어낸 것이다. 허탈한 웃음을 짓고는 냉장고 문을 닫았다. 어찌나 냉장고를 세게 닫았던지 ‘쾅’하는 소리와 함께 ‘흰 봉투’ 하나가 떨어졌다. 봉투는 냉장고에 자석을 이용해 붙여놓은 어떤 안내문 종이와 냉장고 사이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였다. 봉투는 두툼했고, 돈이 들어있었다. 가족 중 누군가의 비상금인 것이 분명했다. 골려줄 요량으로 봉투를 열어보니 1천 원이 10장, 5천 원이 2장 그리고 중간고사 성적표가 들어있었다. 필시, 중학생인 동생의 비상금과 망해버린 시험 성정표로 보였다. 동생의 소행이라고 짐작하니 그가 대단해 보였다. 가족 모두가 매일같이 2~3회는 열어보는 냉장고에 그것도 정중앙 ‘안내문’ 뒤에 비자금과 자신의 치부가 담긴 봉투를 숨길생각을 하다니, 대담해도 너무 대담했다. 동생의 귀여운 반항에 나는 침묵하기로 했다. 봉투를 다시 들어 그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해두고는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향하면서 지금 기억도 온전치 못한 내가 동생의 비자금과 치부 따위는 몇 시간 만에 잊어버리겠지?라고 떠올렸다. 그러자 퍼뜩 내가 병이 날 때까지는 기억이 온전치 못하니까 오히려 이 기회에 미래의 내가 몰랐으면 할 만한 행동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재밌는 농담 같은 생각이었다. 기억이 좋지 못할 때, 미래의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아주 재밌는 농담 말이다. 책상에 앉아 노트를 펴고, 하나씩 써 내려갔다.

1. 미래의 나를 위해 비상금을 책 여기저기 꽂아두기

2. 헤어진 남자친구한테 문자 보내고, 보낸 내역과 답신 삭제하기

3. 나랑 싸운 친구한테 문자 해서 사과하고, 내용 지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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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평소에 살찔까 봐 먹지 못했던 음식 마음껏 먹기

등등 총 10개의 목록을 작성했다. 이제 것 후회할 까봐하지 못했던 행동들이다(물론 1번은 빼고, 1번의 경우 평소에 돈을 꽂아두면 금세 써버리기 때문에 이번에 기억이 온전치 못할 때 확실히 숨기기 위해서 해보는 것이다). 내가 지금 하면, 미래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어차피 기억도 못할 테니까 말이다. 종이를 다시 쳐다보며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엄마가 다녀왔노라고 말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할 때 해야 하는 버킷리스트’를 재빨리 책상 서랍에 두고는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그대로 그 버킷리스트를 까먹었다.


내가 그 버킷리스트를 찾은 것은 약을 다 먹고도 한 달이 지나 병이 완전히 나은 다음이었다. 병이 낫자 병에 걸렸던 그 ‘미씽메모리’가 불현듯이 떠올랐다. 동생의 비상금과 성적표, 엄마가 공과금을 내야 한다고 말했던 말, 냉장고를 닫지 않았던 사실 들이 일상생활 중에 갑자기 번뜩였다. 그리고 ‘기억하지 못할 때 해야 하는 버킷리스트’도 마찬가지였다. 그 기억은 아침에 세수를 하다가 떠올랐다. 급하게 세수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 서랍을 열어 그 리스트를 확인했다. 왜 내가 그때까지 책상서랍을 열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그 리스트는 두 달 내내 그곳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제는 쓸모없어진 이 리스트는 내가 혹시라도 병에 또 걸리게 되면 그때 써야겠다. 그런데 그때는 다시 기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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